7선 의원을 지낸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당수)가 27일 오전 3시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 전 총재의 삶은 한국 현대사와 정치사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주고,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46년 전국학생총연맹 대표의장으로 신탁통치 반대와 반공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 1세대였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4·5·8·9·10·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사사오입 개헌’ 때는 본회의장 단상의 국회 부의장 멱살을 잡고 항의했던 일화도 있다.
지금의 제1야당 뿌리인 민주당을 1955년 창당했고, 5·16 군사쿠데타 이후엔 정치 규제를 당해 해외로 잠시 망명하기도 했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참여해 1차 경선에서 YS를 지지했다가 2차 결선투표에선 DJ 지지로 돌아서 DJ의 ‘대역전 드라마’ 완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6년 신민당 대표 시절 지미 카터 미국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 카드로 군사정권을 압박하자, 미국을 방문해 미군 철수 철회를 호소했다. 이로 인해 ‘사쿠라 논쟁’에 휩싸였으나, 그는 “나라가 있어야 여당도 있고 야당도 있다”며 소신을 꺾지 않았다. 1988년 13대 총선 낙선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고, 자유민주총연맹 총재(1987년),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1996년), 건국50주년기념사업회장(1998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2007∼2009년) 등을 지냈다.
이 전 대표는 운명 직전까지도 북한 핵개발 문제를 걱정했다고 한다. 이달 초 감기 증세가 악화해 입원했으며, 죽음을 직감했을 때는 “안보시국이 엄중한데 무슨 사회장이냐”고 주위에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에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 노재봉 전 국무총리 등의 조문행렬이 멈추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전두환 전 대통령, 정의화 국회의장, 황교안 국무총리,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 손명숙·이희호 여사 등이 조화를 보냈다.
이회창 전 총재는 조문 뒤 기자들과 만나 “태산북두(泰山北斗) 같은 분”이라고 회고했다.
유족들은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를 계획이었지만, 각계각층의 사회장 엄수 의견에 따라 다시 장례절차를 의논할 예정이다.
유족으론 부인 김창희 여사와 아들 이동우 전 호남대 교수, 딸 이양희 유엔 미얀마인권보호관, 사위 김택기 전 의원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02-3410-6917), 발인은 2일 오전이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학생운동 1세대이자 한국 현대사 거목
입력 2016-02-28 21:00 수정 2016-02-29 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