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노태우-박근혜, 패러다임 전쟁

입력 2016-02-28 17:45

지난 10일 개성공단 폐쇄에 이어 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초강경 대북 제재 초안이 마련되면서 정부의 대북 외교·경제정책 기조는 180도 바뀌게 됐다. 최소한 대화·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던 대북정책은 이제 북한 봉쇄와 정권교체 추진이 목표가 됐다. 현 정부하에서는 북한의 핵 포기 선언이나 정권 몰락이 없는 한 남북경제협력은 꿈도 못 꿀 상황이 돼버렸다. 전대미문의 패러다임 변화가 확실하다.

많은 이들은 현 정부가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과 절연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정책의 시발점과 일관성을 고려하면 대북 화해 독트린의 원조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도출한 노태우 군사정권이다. 25년 전 반공정권에서 시작된 대북 외교 패러다임의 혁신은 또 다른 보수정권에 의해 종말을 맞이한 셈이다.

6공화국이 들어선 88년은 지금보다 반공이데올로기의 뿌리가 훨씬 깊은 때였다. 전년도 12월 발생한 북한의 KAL기 폭파 사건으로 반북 정서도 만연했다. 육사 출신으로 12·12쿠데타의 주역인 노 전 대통령은 ‘뼛속까지 반공’ 정신이 가득한 인물이다.

그런 그는 임기 첫해인 88년 7월 7일 남북 상호교류, 북한과 우리 우방국과의 관계개선을 골자로 한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시작으로 그해 10월 현재의 6자회담과 유사한 ‘6개국 동북아 평화협의회의’를 제안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를 발판으로 91년 12월 역사적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차례로 채택했다. 사회주의가 몰락하기도 전인 89년 초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구권, 소련, 중국 등과 차례로 수교하게 된 북방정책은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었다.

외교 패러다임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북한의 핵도발이 계속되는데 마냥 포용정책만 펴선 안 된다는 여론도 많아 현 정부의 신냉전 패러다임 변화를 나무랄 수만도 없다. 문제는 획기적인 패러다임 전환에는 궁극적으로 국민경제 신장을 동반할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현 정부는 과연 이를 얼마나 고민했는가다.

북방정책 입안자인 박철언 전 의원은 자서전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북방정책은 공산권으로 경제무대를 확장시키고 북한 경제를 일정 수준 향상시켜 한민족 공동 번영의 시대를 개막하고자 했다”고 목표를 분명히 했다.

대북 포용, 공산권 수교로 대변되는 노태우정부의 뉴패러다임은 실제 90년대 이후 수출의 지평을 넓히는 등 우리 경제에 엄청난 호재가 됐다. 대중국 수출은 수교를 맺은 92년 26억5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1371억2400만 달러로 52배가량 폭증했고 동구권 수출도 같은 기간 10배 넘게 늘었다. 평화가 주는 간접 효과도 무시 못한다. 노태우정부 당시 김종휘 전 외교안보수석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방외교가 성공하면서 국방 대신 경제와 복지에 투자할 여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반면 현 정부는 대북 봉쇄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주도하면서도 패러다임 변화를 뒷받침하는 경제 비전 제시에 소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상당 기간 북한리스크를 안고 가야 할 이때 노동개혁 입법 통과에만 목매는 모습은 한가해 보이기까지 한다. 북한이라는 블루오션이 사라진 상황에서 어떻게 침체된 제조업·서비스업의 도약을 이룰 것인지, 각종 테러설과 북 도발 우려 등 공포가 주는 소비심리 위축과 국가신용 하락 우려는 어떻게 해소할지에 답해야 한다. 신냉전·안보정국 속에서 임기 평균 2.9%라는 역대급 저성장률을 제고할 경제정책은 무엇인가. 이제 국민은 25년 터울이 진 두 보수정권의 패러다임 성패를 지켜볼 것이다.

고세욱 경제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