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話하다] “하나님이 제일 높은 분” 신사참배 거부-3·1절 맞아 돌아보는 나의 남편 박종렬 목사

입력 2016-02-28 18:38 수정 2016-02-28 22:28
1964년 4월 말 전남 목포 유달산 자락에서의 박종렬 목사. 집회 참석 직후다. 엄순애 사모 제공
故 박종렬 목사
나의 남편 박종렬 목사.

그는 1921년 5월 충북 청원(현 청주시)의 한 완고한 유교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학으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사서삼경을 줄줄 외울 정도로 동네에서 신동이라 부를 만큼 총명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대동아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였다. 그 동네에 작은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이 한두 사람씩 몰려올 때 남편은 열다섯 나이에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완고하신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쳐 집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많은 고생을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주님의 영이 살아계셔서 자기중심에 임재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어머니도 아들을 따라 교회에 나오시고 독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시대는 목사님이나 전도사 같은 신앙 지도자가 희소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예배당은 세워졌지만 순회전도사 한 사람이 한 달에 여러 교회를 순회해야 하기 때문에 주일이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올 수 없었다. 그래서 예배 인도자가 안 오는 주일은 남편이 예배 인도를 했다고 한다.

그때 남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구원에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열심히 말씀을 증거했다고 한다.

남편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되고 늦게 평양 요한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학교마다 신사참배를 실시할 때였다. 남편은 신사참배에 불참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마치 악마의 화신같이 생긴 일본 형사 여러 명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어린 학생을 상대로 신문을 하는 것이었다.

“스데반같이 순교하게 해주세요” 고문실서 기도

한 경찰이 남편을 보고 묻기를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가 높으냐? 네가 믿는 하나님이 높으냐”고 묻는데 남편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신데 당연히 하나님이 세상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일 무섭게 생긴 형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빠가야로(바보)” 하면서 남편을 끌고 어디론가 가는데 마음속으로 기도하기를 ‘주여 스데반같이 순교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다고 증언했다.

남편을 끌고 간 곳은 피비린내 나는 고문실이었다.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들이 피를 흘리며 고문을 당했는지 시멘트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했다. 일경은 남편을 몽둥이로 때리고 또 때렸다. 한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고 마음이 평안했다고 한다. 사람이 매를 맞으면 비명을 지르고 죽는 시늉을 하는 법인데, 찍소리를 안 하니 오히려 때리던 형사가 기진맥진해 주저앉으면서 “고노야로 곤나 히도이야 즈와 하지메다 칙쇼(너같이 지독한 놈은 처음 보겠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남편은 그때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고문당할 때 주님께서 오셔서 나를 감싸주심을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그때 남편을 고문한 형사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자인데 누구든지 그 자에게 잡히면 병신 아니면 사망이라고 했다. 그 시대는 일본세상인데 피압박 민족인 우리는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고 아무리 억울해도 호소할 데 없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출옥한 후 얼마 안 되어 남편을 고문했던 형사가 전사해서 유골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남편은 어릴 때부터 많은 시련을 겪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남편은 출옥 후 몸에 병을 얻어 몇 년 동안 신부전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가면서 하나님께 ‘왜’냐고 질문도 항의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았다. ‘하루 속히 하늘나라로 나를 데려가주세요’라고 기도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남편은 온 몸이 뚱뚱 부어서 눈도 뜰 수 없게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뜰 안에 뛰노는 강아지를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너는 나보다 낫구나” 하고 신세한탄을 했다.

일제의 압박은 날로 심해졌다. 남자라고 하면 모조리 잡아와 총알받이로 쓰는 판국인데 남편을 몇 번 잡으러 왔다가 뚱뚱 부어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남편을 보니 기겁을 하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왜 나를 이런 난치병에 걸려서 죽게 버려두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그저 4년 동안 날마다 고통 속을 헤매고 있는데 하루는 밖에서 동네 사람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일본이 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됐다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감전된 것같이 정수리에 뜨거운 불로 태우듯 머리서부터 목구멍으로 그 불덩이가 차 밑으로 내려오면서 온 몸을 태우는데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조국의 해방 1945년 8월 15일. 4년 동안 질병의 보자기로 남편을 싸서 일제의 총알받이로 못 가게 막아주신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그때에야 깨닫고 눈물로 감사드렸다는 것이다. 남편은 성령의 치유를 받고난 후 하루가 다르게 차도가 있어 건강을 회복했다. 남편은 성격이 과묵하면서도 치밀한 사람이었다. 대쪽 같은 강직한 성격에 강한 통찰력과 지도력, 특별히 글을 쓰는 문장력과 어휘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목회자로서 특별한 하나님의 영성과 능력을 받은 사람이었다.

남편은 몸에 여러 가지 병을 지니고 살면서 금세 꺼질 듯한 자기의 몸을 알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할 때는 언제나 마지막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항상 성령의 능력이었다. 남편은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는 때가 있었다. 설교 준비를 위해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기도를 드릴 때면 하늘문이 열리고 설교를 위한 계시를 보여주시는데 너무나 두렵고 기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은 또 명예와 물질에 대해서는 항상 초연한 사람이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항상 청렴결백을 삶의 목표로 살았다. 그래서 자기 호를 우백(又白)이라 정했다. 주께서 깨끗하게 희게 해주신다는 뜻이다.

그는 기도드릴 때면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한다. “주여, 진토에서 저를 일으키사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영광을 받으신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어린 나이 때부터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신학을 나오고 목회자로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실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남편의 충성심을 아시고 노년에 큰 축복으로 보상해주셨다. 5남매 자녀들이 다 훌륭하게 자라서 목사, 교수 직분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큰사위는 의사다. 그는 10년 전 캄보디아에 헤브론선교병원을 세웠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고결한 목회자의 삶을 자녀들이 본받는 것 같다. 남편은 65세 때 충무교회를 20년 만에 조기 은퇴하고 자유롭게 국내와 국외 각 교회 초청으로 쉴 새 없이 활동했다. 그리고 16권의 저서를 남겼다. 2004년 예수님 품에 돌아갈 때까지 그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

엄순애 사모

故 박종렬 목사=△1947년 청주제일교회 전도사 △46년 엄순애와 결혼 △55년 청주 세광학교 교목실장·청주 서남교회 개척 10년간 시무 △65년 서울 충무교회 부임 20년간 사역 △70년 미국 풀러신학교 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선교100주년(1984) 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