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로제타도 그랬다. 그의 합리적 성품과 교육에 대한 높은 식견은 아들 셔우드 홀의 양육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에서 태어난 셔우드는 어린 시절을 조선의 아이들과 놀면서 보냈다. 그의 회고록에는 연싸움, 눈사람 만들기, 팽이 놀이, 널뛰기를 했던 어린 시절을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했다. “누구나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조선으로 돌아왔던 그해(1897년)의 겨울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셔우드는 조선 음식도 좋아했다. 음식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던 어머니와 달리, 그는 박에스더나 노수잔이 만들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었다. 로제타는 지방 여행 때 요리사가 꼭 동행했지만, 셔우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들에게 책임감 심어준 강인한 엄마
셔우드의 회고록은 조선이 무방비 상태로 근대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겪었던 아픔도 전해준다. 1899년 로제타가 셔우드를 데리고 1년 전 남편 곁에 묻힌 딸 이디스의 무덤을 찾아 서울 양화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해는 서울에 전차가 처음 들어온 해였다. 어린 셔우드는 신기한 장난감을 본 듯 전차를 타보며 신나게 놀았다. 하지만 괴이하게 생긴 물건을 처음 본 조선 사람들은 어이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안개가 짙게 내린 어느 여름날, 한밤 더위를 피해 길에 나와 철로를 목침 삼아 잠을 자던 사람들이 달려오는 새벽 전차에 목숨을 잃었다. 안개가 걷히자 참혹한 광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분노한 사람들은 차장을 공격하며 전차를 전복시키고 불태웠다. 사람들은 ‘외국 마귀들의 발명품’이라고 전차를 저주하며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로제타는 남편의 부재 속에 여동생을 잃고도 씩씩하게 자라는 아들이 기특하면서도 때론 안쓰러웠다. 그럴 때마다 나약하게 키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특히 교육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하고 강인한 엄마였다. 로제타가 셔우드에게 가장 먼저 심어준 것은 책임감이었다. 1900년 1월 이디스 어린이병동을 서양식 건물로 세우면서, 로제타는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먹이기 위해 평양에서 처음으로 물탱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물탱크의 관리를 일곱 살인 셔우드에게 맡겼다. 비가 올 때마다 양철 지붕에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는 첫물은 밖으로 내보내고, 깨끗해진 물부터 물탱크로 들어가도록 수로의 잠금 장치를 조절하는 일이었다. 셔우드는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1906년 여성병원과 어린이 병동이 화재로 전소되자, 로제타는 화강암으로 새 병원을 다시 짓기로 했다. 상하수도와 온수난방 시설까지 갖춘 현대식 건물을 계획했다. 로제타는 셔우드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그의 나이 열 네 살이었다. 셔우드는 그때의 막막함을 회상하며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로제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2년 후 조선인 목수들과 함께 벽돌과 화강암으로 튼튼한 건물을 지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벽돌 건물도 구경 못해본 소년이 지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아이는 믿는 만큼 자란다고 아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린 눈에도 무모해 보였던 어머니의 도전 덕분에 셔우드는 직접 경험해보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다는 것을 체득했다.
여행도 교육의 한 부분
로제타는 경제적 자립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셔우드가 열다섯 살이 되자, 남편이 남겨준 생명보험금 일부를 건네며 수익 사업을 하게 했다. 어린 아들에게 제법 큰 돈을 내준 것은 1년 전 셔우드가 러시아 박물학자에게 나비와 곤충을 채집해 보내고도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셔우드는 어렵게 채집한 곤충들을 러시아에 보냈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곰팡이가 피는 바람에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했다. 운반에 필요한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로제타는 경제적 자립 능력을 갖추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셔우드는 병원 건물을 세웠던 경험을 살려 건축을 시작했다. 선교사 두 가족이 평양으로 파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한 건물에 두 가족이 살 수 있는 연립주택을 짓기로 계획했다. 선교활동도 돕고 수익도 내자는 심산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이 사업은 일거양득이 되어 후에 대학 학자금을 보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로제타의 전기를 쓴 박정희 작가의 말처럼, 로제타의 교육 방식은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이었다.
로제타는 위기조차 교육의 기회로 삼았다.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렸다. 한국 대표로 임명된 로제타는 대회에 참석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안식년 휴가를 보낼 계획으로 셔우드와 함께 출발했다. 로제타는 이 여행에서도 다소 위험할 수 있는 모험을 감행했다. 익숙한 배편을 이용하지 않고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주와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를 타기로 했다. 초행길에 두 사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졌다. 여행 이틀 째 되던 날, 만주 목단에 도착하고 나서야 시베리아 횡단 기차표를 평양에 두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제타는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셔우드에게 말했다. “전보를 쳐서 기차표를 국경 지역으로 가져오라 할 테니 네가 가서 받아 오너라.”
셔우드는 마적 떼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홀로 그 미션을 수행했다. 그때의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돌아보며 셔우드는 이렇게 고백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여행은 교육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이점에서는 나쁜 학생은 아니었다. 내 나이 열여섯,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날 준비를 갖춘 때였다.” 셔우드가 후에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공부를 마치고 의료선교사가 되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로제타의 무한한 신뢰와 두려움 없는 용기가 바탕이 되었다.
하희정 박사<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
[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어려서부터 힘든 미션 맡겨 강인한 아들로 키워
입력 2016-02-29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