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논픽션작가 가와타 후미코 “위안소,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운영했다”

입력 2016-02-29 04:00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뒤 밑바닥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아온 재일 한국인 할머니 29인의 목소리를 담아낸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바다출판사)가 출간됐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할머니들의 얘기를 기록한 이는 일본의 여성 논픽션작가 가와타 후미코(73·사진)씨다.

가와타씨가 1987년 출간한 ‘빨간 기와집’은 오키나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재일 한국인 배봉기(1914∼1991)씨에 대한 기록으로, 국내에서 김학순씨를 시작으로 증언이 터져 나오기 한참 전에 작성된 한국인 위안부 최초의 증언이었다. 그는 이 책을 시작으로 ‘황군위안소의 여자들’ ‘전쟁과 성’ ‘위안부라 불린 전장의 소녀’ ‘위안부 문제를 물어왔다는 것’(공저) 등을 집필하며 평생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추적해 왔다. 이번 책에도 일본에 생존해 있는 유일한 한국인 위안부 송신도(1922∼)씨의 증언을 수록했다.

지난 23∼25일 이메일을 통해 진행된 인터뷰에서 가와타씨는 “배봉기, 송신도씨가 내 인생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여자와의 만남으로 위안부 문제는 내 인생의 주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식은땀을 흘려가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얘기를 들어왔다는 가와타씨는 지난 12월 28일 이뤄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이번 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당사자에 대해 진지한 사과 자세를 보여주지도 않고, 일본군이 저지른 중대한 인권 침해 범죄를 반성하지도 않고, 후세에 그 사실을 전하려는 의사도 없고, 다시는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도 없는 합의였다”며 “일본 정부는 10억엔을 지불하면 위안부 문제에서 눈을 돌릴 수 있고 자자손손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가와타씨는 “강제 연행을 나타내는 공문서는 없다”는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1993년 8월 제2차 정부 조사 결과에는 일본 점령 하에 있던 인도네시아 세마랑에서 일본 군인이 젊은 네덜란드인 여성을 위안소로 연행했다는 기록이 포함돼 있었다”며 “강제 연행을 나타내는 공문서는 없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의 1, 2차 조사 결과를 발표된 뒤로 일본과 한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자료와 증언이 나오고 있다”면서 “위안소 제도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 결과는 일본군이 입안했으며, 위안소의 설치·유지·관리·통제를 군 주도로 한 것이 명확하다는 걸 말해준다”고 말했다.

“일본군은 주둔 부대의 규모에 맞게 위안소를 배치하고 위안소 건물을 건축하거나 차용하는 협상도 했습니다. 위안소 이용 규정은 각 부대에서 만들었고, 계급별로 이용 요금과 이용시간을 설정했어요. 위안부가 사용하는 식량, 침구, 생활용품 등을 지급하거나 조달의 편의를 제공했지요.”

가와타씨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소는 1937년 12월 말 난징 점령 후 급속하게 확대됐다. 당시 위안소를 설치한 제1의 목적은 장병들이 현지 매춘 시설에 출입해 성병에 걸리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항생제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성병은 결핵보다 긴 치료를 요했는데, 장병의 성병 발병률은 매우 높았기 때문에 병력 저하의 요인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 주민 강간 방지, 병사 사기 진작, 기밀 유출 방지 등의 목적도 있었다. 앞서 1937년 9월 일본군은 ‘야전군 매점 운영 규정’에 위안소 설치 조항을 추가했다.

가와타씨는 “위안소는 일본군의 병참 시설의 일부로 설치된 군인·군속 전용 시설이었다. 90년대 초반 일본 정부는 군과 위안소의 관계를 ‘군의 관여’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위안소는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구축한 제도 하에서 운영하는 시설이었다”고 강조했다.

한국인의 위안부 문제 인식과 관련해서는 숫자 오류를 지적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숫자는 총 5만명에서 20만명으로 추계되고 있다”면서 “이런 추정이 비록 정확한 건 아니라고 해도 한국인 위안부가 20만명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인 위안부의 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군이 침략한 각지의 여성들도 위안부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논란이 되고 있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읽었느냐는 질문에 “절반밖에 읽지 않았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고 답변했다. 그는 “가장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은 일본군 위안소 제도와 일본에서 긴 역사가 있는 공창 제도의 혼동이었다”면서 “점령지에 설치한 위안소와 일본 각지에 설치된 유곽은 군사시설이었는지 여부가 결정적인 차이”라고 설명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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