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 과거 청년 윤동주, 2016년 오늘을 사는 청년에 묻는다

입력 2016-02-26 20:54
2013년 처음 공개된 윤동주 시인(왼쪽)과 송몽규 열사(오른쪽)의 모습. 1937년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 즈음으로 추정된다. 왼쪽 작은 사진은 시인의 연희전문대학 졸업 사진.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 제공
시인의 조카사위 강석찬 목사가 지난 2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교정에 있는 윤동주 시비 앞에서 윤 시인의 시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 시인(왼쪽)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경찰서에 수감된 고종사촌형 송몽규를 면회하는 장면.
2016년 2월, 한국사회는 다시 시인 윤동주와 마주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가 개봉하면서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영화에 등장한 그의 시를 읽고, 시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스물여덟 살, 미완의 청춘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지 70년하고도 1년이 더 흐른 시간.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란 타이틀만큼은 그대로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도 버젓이 살아가고, 탐욕에 눈이 멀어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도 누구 하나 머리 숙이지 않는 ‘염치를 모르는 시대’. 이런 시대에 평생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했던 시인을 마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 ‘동주’는 70%는 사실, 30%는 허구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알아채기 어렵다. 일일이 실증할 수 없었던 시인의 삶의 여백은 후대의 상상력으로 채워졌다. 이를 확인하고 싶다면 앞서 수고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 기대거나, 누군가를 찾아 도움을 청할 수밖에. 기록 중에는 1988년 소설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과 김응교 숙명여대 리더십교양학부 교수의 최근작 ‘처럼’이 손에 꼽힌다. 송몽규의 조카 송우혜가 쓴 평전은 단연 독보적이다.

동주 가족, 그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

반면 세월이 흐른 만큼 시인의 짧은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기억하던 이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의 입을 통해 아직 녹슬지 않은 기억의 잔상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시인의 조카사위이자 공동체 ‘예따람(예수님 따르는 사람들)’을 이끄는 강석찬 목사를 2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교정에서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강 목사는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 권사의 사위다. 어린 혜원과 남동생 일주의 모습은 영화 ‘동주’에서 시인의 시 ‘아우의 인상화’의 한 구절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사람이 되지’/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對答)이다.) 혜원, 일주 말고 영화에 나오지 않은 남동생 광주가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시인 기념사업에 앞장섰던 윤일주 성균관대 교수는 85년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의 아들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 윤 권사와 남편 오형범 장로가 기념사업을 맡았다. 윤 교수가 국내에서 원고 및 유품 관리, ‘윤동주 문학관’ 건립 감수 등을 했다면, 80년대 호주로 이민을 떠났던 윤 권사 내외는 중국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에 있는 시인의 묘소와 생가를 관리해왔다. 그나마 5년 전 윤 권사에 이어 지난해 오 장로마저 세상을 뜨면서 두 사람의 딸이자 강 목사의 아내인 오인경 사모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인터뷰 당일에도 오 사모는 룽징에서 진행된 기념사업 참석차 중국 방문 중이었다.

강 목사는 “시인의 가족들은 가문의 역사를 알아야 현재의 ‘우리’를 알 수 있다며 시인의 역사와 기록을 찾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정작 외부에 알리는 데는 소극적이었다”고 전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누구 하나 잘못 행동해서 맑고 순결한 시인의 이미지에 흠집을 낼까 늘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송몽규, 어쩌면 동주의 또 다른 이름

영화 ‘동주’ 시사회 후에도 가족들은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동주는 너무 유약하게, 그의 고총사촌 형 송몽규는 지나치게 투쟁적인 인물로 묘사됐다는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영화를 통해 잊혀졌던 송몽규의 존재와 두 사람의 관계가 부각된 것은 좋지만 ‘칼과 펜’처럼 극단적으로 대비됐다는 얘기다.

끊임없이 시를 통해 세상을 고민했던 동주와 달리 몽규는 일단 행동에 돌입하고 보는 혁명가였다. 그런 면에서 몽규는 동주의 둘도 없는 친구인 동시에 늘 동주의 양심을 자극한 존재였다. 영화에서 동주는 일본 경찰에게 발각된 뒤 고향으로 가자는 몽규의 청을 거절한다. 그리고 돌아서는 몽규의 뒷모습을 보며 ‘자화상’을 읊조린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강 목사는 “이 시는 39년 시인이 연희전문대학 시절 쓴 것”이라며 “송몽규의 모습이 윤동주 내면에 있는 또 다른 동주의 모습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시대적 배치를 달리 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17년 룽징시 북간도 명동촌에서 석 달 터울로 태어난 동갑내기 두 사람은 ‘빛과 그림자’처럼 달랐지만 늘 붙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떠날 때도 같은 형무소에서 20일 남짓 시차를 두고 갔다. 45년 2월 16일 동주가 먼저 숨졌고, 다음달 7일 몽규가 옥사했다. 강 목사는 “몇 해 전부터 동주 시인의 기일에 몽규 후손도 함께 와서 한날 두 분의 추도 예배를 드린다”고 귀띔했다.

명동촌, 그리고 정병욱

영화는 시인의 삶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두 가지를 충분히 그려내지 못했다. 첫 번째는 시인의 고향 ‘명동촌’이다. 강 목사는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목사님을 중심으로 시대의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살며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곳”이라며 “시인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를 준비하던 공간’에서 자랐기에 늘 괴로워하면서도 민족의식을 놓치지 않고 살아갔다는 것이다.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시절 시인은 동경제대 출신의 까랑까랑한 명희주 선생 같은 지사들에게 배웠다. 뿐만 아니라 명동촌은 시인이 몽규, 문익환 목사 등 쟁쟁한 친구들과 우정을 쌓으며 동양고전과 신학문을 자유롭게 배웠던 이상향이기도 했다.

두 번째, 영화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출간 과정을 다루지 않았다. 시집 출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연전 후배 고 정병욱 서울대 교수 대신 일본어와 영어로 시를 번역해 출간을 도우려던 가상의 인물 일본여성 쿠미를 등장시켰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자칫 영화가 시인이 마치 시집 출간에만 매달렸던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닐지 우려하기도 했단다.

한글로 시 쓰는 것 자체가 위험했던 시대에 시인은 시집 필사본 3개를 만들었다. 이 중 1부를 본인이 갖고 정병욱과 이양하 교수에게 1부씩 맡겼다. 48년 정음사에서 발간된 초간본은 정병욱이 보관했던 19편과 친구 강처중이 갖고 있던 유품 속 12편을 합친 것이다. 강 목사는 “정 교수가 전남 광양 본가에 필사본을 피신시켰고, 이를 그 집 마루 밑 큰 독에 숨겨뒀던 덕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고 한다”고 전했다.

동주, 하나님 앞에 섰던 사람

그동안 윤동주의 시는 극단적으로 읽혔다. 한쪽에선 저항의 상징이라며 항일 민족시인으로 추앙했고, 반대편에선 나약하지만 순결한 감성을 지닌 청년문사의 서정시로 일축했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강 목사는 무엇보다 “윤동주의 시어 하나하나가 신앙을 빼놓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십자가’ ‘자화상’ ‘팔복’과 같은 시뿐 아니라 첫 시 ‘초 한 대’ 등 수많은 시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와 고뇌를 발견할 수 있다. 대표작 서시는 ‘늘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고민했던 인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20대 중반의 시인이 남기고 간 시가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고 했다. 김응교 교수는 이런 윤동주의 시를 “자기의 존재를 투시하는 ‘성찰의 언어’이며, 실천을 자극하는 ‘다짐의 시’”라고 불렀다.

강 목사는 누구보다 청년들이 영화를 보길 희망했다. 과거의 청년이 오늘을 사는 청년에게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냐’고 가만히 묻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강 목사는 “그런 절망적인 역사 속에서도 신앙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시를 쓰고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던 시인의 모습에서 청년들이 영혼의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했다.

다시 현실엔 없었던 영화 속 한 대목. 정지용 시인은 창씨개명을 고민하는 동주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지.” 세상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있냐는 시인의 나지막한 질문에 과연 누가 선뜻 답할 수 있을까.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