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로 지방에 내려갈 일이 많은 주모(28)씨는 “지방에서는 조금만 시외지역으로 떨어지면 휴대전화 무선통신이 잘 터지지 않는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주씨는 현재 A통신사 사용자다. 그는 “곧 휴대전화 기기를 변경할 계획인데 경쟁 통신사로 갈아탈 것”이라고 강조했다. 온 가족이 A통신사를 쓰면서 가족할인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지만 할인을 포기하고서라도 통신사를 바꿀 것이라고 했다.
품질 불만이 안티로
사용하는 제품에 납득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소비자들은 안티로 돌아선다. 출고 당시부터 제품에 하자가 있을 경우는 물론이고 사용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마찬가지다. 무상 사후서비스(AS) 기간이 있다고는 하지만 서비스센터를 찾아가야 되는 경험 자체가 브랜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대학생 김모(24·여)씨는 1년 정도 사용한 B사 노트북이 자주 고장을 일으켜서 불만이다. 노트북으로 학교 과제를 하던 도중 하드디스크가 오류를 일으키는 바람에 서비스센터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AS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학생으로서는 적지 않은 15만원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뒤 또 노트북이 켜지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다. 김씨는 “나중에 다시 노트북을 산다면 B사 제품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직장인 강모(43)씨는 C사 스마트폰만 고집한다. 과거 줄곧 경쟁사 제품을 썼던 그는 휴대폰이 자주 뜨거워져 깜짝 놀라곤 했다. 특히 통화 중 휴대전화에 열이 발생하면서 수시로 전화를 끊어야 했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갑자기 뜨거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그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익숙하지 않은 B사 제품으로 바꾸게 됐고, 현재는 만족하고 있는 상태다. 강씨는 다시는 예전에 썼던 기업의 스마트폰은 구매하지 않을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갑(甲)’에 대한 반발 심리 표출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대상을 향한 반발도 안티 계층을 형성한다. 이 경우 제품의 품질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안티소비자들이 주로 업계 1위나 대기업을 겨냥해 활동한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재벌에 대한 비판적인 정서가 기업 안티를 만드는 계기로도 이어진다.
국내 최대 항공사인 대한항공도 홍역을 치렀다. 재작년 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이른바 ‘땅콩 회항’ 파문을 일으키면서다. 피해를 입었던 승무원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비등하는 한편 총수 일가에 대해선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해당 사건과 무관한 총수 일가의 과거 행적들까지 다시 불거졌다. 1969년 설립된 대한항공은 그간 고정적인 안티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아니었다. 당시 재계에서는 평소 을(乙)의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던 일반 국민들의 울분이 땅콩 회항 사건을 계기로 한번에 터진 것으로 분석했다.
이후 조 회장은 수차례 고개 숙여 대국민 사과를 했다. 또 기업 문화를 개선한다는 취지로 사내에 소통위원회를 만들었다. 조 회장은 작년 초 신년사를 통해 “국민의 질책을 달게 받아 잘못을 진심으로 깨닫고, 사려 깊은 행동을 통해 더 나은 기업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내가 호갱이라니…
‘호갱’ 논란도 꾸준히 안티를 만들어 내는 배경이 되고 있다. 호갱은 호구와 고객을 합성한 단어로 기업을 비롯한 판매자들이 고객을 우습게 보는 현실을 비꼬는 표현이다.
D사 자동차를 큰 사고 없이 8년째 탔던 최모(37)씨는 차량에 문제가 생겨 정비소를 방문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D사 유니폼을 입은 정비사가 자동차에 문외한인 최씨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참고 넘어갈 만했다. 그런데 최씨와 상의도 없이 정비사가 차량을 수리하기 시작하자 최씨는 벌컥 화가 났다. 수리비만 30만원이 발생했다. 정비소 관계자들과 고성을 주고받은 최씨는 그 후 D사에서 새 차종을 낼 때마다 비판부터 하고 보는 ‘열혈 안티’가 됐다.
최근 불었던 해외직구(직접구매) 열풍 이면에도 그간 국내 소비자들이 호갱 취급을 당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김모(34)씨는 작년에 E사의 전기레인지를 100만원에 구매했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친동생은 똑같은 제품을 세일 기간을 이용해 절반도 안 되는 40만원에 샀다고 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겠느냐는 생각에 인터넷을 들여다 본 김씨는 실제 다른 가격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허탈함이 밀려왔다.
해외 기업에는 관대하다?
호갱 논란이 국내 기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에서 가격을 비교하기가 수월해지면서 외국산 제품에 대해서도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유독 해외 기업에 대해서는 관대한 분위기다. 이 때문에 한국 소비자들이 ‘글로벌 호갱’을 자처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배출가스 조작 파문에 휩싸였던 폭스바겐그룹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승승장구했다. 폭스바겐은 2015년 국내에서 3만5778대를 판매하며 3만719대를 기록했던 2014년보다 오히려 판매량이 증가했다. 아우디도 2014년의 2만7647대를 훌쩍 넘긴 3만2538대 판매량을 올렸다.
파격적인 프로모션으로 판매량을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되기는 하지만 국내 소비자들이 차별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현상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미국과 캐나다의 배출가스 조작 차종 소유주들에게는 1000달러 상당의 보상이 제공됐지만 한국 소비자들에 대한 보상 계획은 나오지 않고 있다.
재작년 말 국내에 상륙한 글로벌 가구업체 이케아도 가격 논란에 휘말렸다. 소비자문제연구소 컨슈머리서치는 지난해 6월 한국에서 판매되는 이케아의 소파와 수납장 평균 가격이 미국·독일·일본보다 14.8∼19.5% 비싼 것으로 집계했다. 일부 제품은 이들 국가 판매가보다 2배 이상 비싼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이케아는 국내에서 3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 지난 밸런타인데이에 앞서 수입 초콜릿이 외국보다 한국에서 비싸게 판매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관세 면제 한도까지 초콜릿을 구매하는 경우를 기준으로 조사대상 제품 6종 모두 국내 판매가보다 국외 구매가가 최소 3.9%에서 최대 43%까지 저렴했다.
수입 과일과 주류도 한국 판매가가 주요국 가운데 최상위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시민모임이 지난해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13개국 주요 도시에서 판매되는 35개 품목의 판매가격을 조사해 지난달 발표한 결과다. 미국산 청포도는 미국 현지보다 거의 두 배 가까운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수입 맥주와 와인도 다른 나라에 비해 비쌌다.
안티도 품어라
대체적으로 기업들은 안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안티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 자체에 대해 꺼리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대기업 관계자는 26일 “안티를 공개적으로 거론했다가 오히려 기업의 부정적인 면모들이 부각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며 “이에 대부분 기업들이 고객서비스 교육을 강화하는 수준에서 안티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재계 서열 2위 현대자동차그룹은 공식적으로 안티를 품기 위한 노력에 나서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현대차는 내수 시장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던 상황에서 2014년 10월 국내커뮤니케이션실을 신설했고 이어 기아차가 이달 초 같은 이름의 조직을 만들었다.
국내커뮤니케이션실은 온갖 의혹 또는 오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활동을 공개적으로 벌이고 있다. 현대차 안티들이 다수인 보배드림 사이트 회원들을 초청한 행사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보배드림 회원들을 안티라고 선을 긋기보다는 내부 혁신의 계기를 만들어주는 소중한 조언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기업 활동의 주요 리스크로 떠오른 안티에 대해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먼저 다가가 소통하려는 노력을 주문했다. 배순영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시장연구팀장은 “기업이라는 집단이 사회에 기여는 안 하고 이익밖에 모른다는 생각에 안티들이 반감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소비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모아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김형범 한국생산성본부 CS(고객서비스)경영센터 본부장은 “소비자들이 불만을 느끼는 사항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성열 최예슬 기자 nukuv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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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2-27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