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근무 평가에 영향이 갈 수도 있어. 그러니 휴가는 신청하지 않았으면….”
서울의 한 대형 종합병원에서 전공의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A씨(27)는 지난 19일 담당 교수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달 말 ‘항의성 휴가’를 가려고 했는데 그걸 만류하는 전화였다. 결국 A씨는 휴가를 포기했다. 단체로 휴가를 신청하려던 다른 인턴들도 슬그머니 뜻을 접었다. ‘의료계 들어오기 전부터 찍힌다’ ‘일주일만 보고 말 사이가 아니다’ 등 여러 압력에 밀렸다.
흔히 인턴은 의료계의 최약자로 불린다. 보통 인턴부터 레지던트까지 같은 병원에서 마치기 때문에 담당교수나 병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병원 인턴들이 ‘집단 연차휴가’라는 단체행동을 시도한 이유가 무엇일까.
발단은 ‘조기 소집’이라는 관행이다. 각 병원은 매년 3월 1일부터 근무하는 인턴을 1, 2주 먼저 불러 일을 시켰다. 대신 1, 2주 빠르게 인턴을 마치게 해줬다. 아무도 토를 달지 않던 이 관행은 대한병원협회가 지난 11일 보낸 공문에 발목이 잡혔다. 협회는 의사면허가 나오기 전에 미리 소집해 수련기간에 들어가면 ‘무면허 의료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알렸다.
이 병원도 올해부터 법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3월부터 인턴을 받기로 하면서 지난해 1주일 먼저 소집된 기존 인턴들이 2월 마지막 주의 업무공백을 메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억울하게 1주일 더 인턴생활을 하게 됐는데도 ‘추가 급여’ 얘기는 없었다.
문의가 계속되자 병원 측은 이메일을 보내 “급여 지급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2월 말까지인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않으면 계약 위반으로 수련이 취소될 수 있다”는 문구를 덧붙였다. 사실상 ‘협박메일’을 받은 인턴들은 남아 있는 휴가를 2월 마지막 주에 몰아서 쓰는 ‘연차투쟁’을 공언하고 나섰다.
연차투쟁 소식을 접한 병원장의 대응은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다. 병원장은 19일 교수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인턴들에게 1일 10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연차투쟁은 무리한 요구이자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이어 “각 과장들이 환자 진료에 이상이 없도록 인턴들을 설득해 달라”고 덧붙였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인턴들은 “병원이 우리를 돈만 밝히는 사람 취급했다”며 분노했다. 이들은 “잘못된 관행을 없애는 데 동의한다. 다만 추가 업무에 적절한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발이 거세지자 병원장은 22일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인턴 대표들에게 유감을 표명했다. 이렇게 사태는 봉합됐다. 당장 다음 달부터 레지던트로 이 병원에서 일해야 하는 인턴들도 더는 집단행동을 고집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내부 불만은 ‘현재 진행형’이다. 인턴을 절대적 ‘을’로 본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서다. B씨(28)는 “겉으로만 해결됐을 뿐”이라며 “이번 사태를 보며 병원이 교육자보다 사업자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고 꼬집었다. 대한전공의협의회 관계자는 25일 “상대적으로 신분이 취약한 인턴들에게 병원이 불이익을 줄 것처럼 말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
[단독] 의료계 乙 인턴들 ‘연차투쟁 미수 사건’
입력 2016-02-25 17:40 수정 2016-02-25 2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