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처음처럼] 병상에서 매만진 원고… 90여편 새로 추가

입력 2016-02-26 04:00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두 권의 책을 매만졌다. ‘담론’이라는 책을 지난해 봄에 출간했고, ‘처음처럼’ 개정증보판 작업에 매달렸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나면서 ‘담론’은 그의 마지막 책이 됐다. 그가 남긴 유언은 알려진 게 없다. 그의 컴퓨터 속에 어떤 글들이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담론’에 죽음을 앞둔 그의 사유가 희미하게 배어날 뿐이다.

신 교수는 개정증보판 ‘처음처럼’이 출간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글을 고치고 또 고치는 성격이라서 수정할 게 거의 없는 상태로 출판사에 넘기는 걸로 유명하다. 그런 후에도 출간 직전까지 교정을 거듭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고를 넘긴 후 자기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지 못했다. 서문을 쓸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2007년 ‘처음처럼’을 처음 출간할 때 붙였던 서문을 그대로 실어야 했다.

‘처음처럼’은 서화에세이집이다. 글씨나 그림에 한 단락, 길어야 서너 단락 분량의 아포리즘을 붙이는 구성이다. 책 제목으로 사용된 ‘처음처럼’이란 글은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그는 ‘어깨동무체’ ‘민체’ 등으로 불리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확보한 한글서예가였으며, 붓이나 펜을 이용한 삽화도 종종 그렸다. 그림은 감옥에서 쓴 옥중 서신의 귀퉁이에서 시작됐다. 어깨너머로 그의 편지를 함께 읽을 어린 조카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처음처럼’은 총 215편을 수록했는데, 초판본과 비교하면 새로 추가된 게 90편 가까이 된다. 병상에서 원고를 추리고 수정하고 추가했다. 제목을 바꾸거나 그림을 교체한 경우도 많다. 출판사는 첫 글 ‘처음처럼’과 마지막 글 ‘석과불식’만 그대로 두고 전체 구성을 바꿨다. 전체 4부 중 3부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에는 그가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부르는 감옥 일화들이 묶여 있다. 초판본에는 실리지 않은 원고들이다. ‘세월호’처럼 비교적 최근에 작성된 글들도 눈에 띈다.

출판사는 ‘처음처럼’ 개정증보판의 초판을 사는 독자들에 한해 ‘청구회 추억’이라는 소책자를 제공한다. 신 교수가 감옥에서 하루 두 장 제공받는 손바닥만한 재생휴지 29장에 걸쳐 쓴 ‘청구회 추억’은 한국어로 써진 가장 아름다운 산문 중 하나로 꼽힌다. 이창동 감독은 젊은 대학강사와 가난한 소년들 사이의 우연한 만남과 우정을 다룬 이 단편소설 같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 감옥에 갇힌 20대 청년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흘려보낼 수 있었는지 놀랍고,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 왜 이 이야기를 써야만 했는지 궁금해진다. 신영복이 누구인가에 대해 그 어떤 글보다 많은 걸 알려준다.

‘청구회 추억’은 그가 감옥에서 나온 후 이사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발견된 원고라고 한다. 지금까지 몇 차례 출간됐는데, 이번에 만들어진 소책자는 그의 육필을 그대로 살려 각별한 느낌을 준다.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