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성장 가르쳐준 후원자이자 멘토”… 정운찬 前 총리가 전하는 스코필드 박사

입력 2016-02-23 20:20
정운찬 전 총리가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스코필드 박사와의 인연을 풀어놓고 있다. 전호광 인턴기자
1964년 스코필드 박사가 영어성경공부 제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뒷줄 맨 왼쪽이 정운찬 전 총리다. 가운데줄 왼쪽 둘째번에 김근태 전 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제공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내한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스코필드박사내한100주년기념사업회 의장을 맡은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정 전 총리는 13세 철부지 소년 시절이던 1960년 4월 스코필드 박사를 처음 만났다.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던 스코필드 박사가 1958년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로 한국에 돌아온 직후였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학교친구 아버지였던 이영소 서울대 교수님의 소개로 스코필드 박사를 만났어요. 박사님은 등록금과 생활비만 지원해주신 게 아니라 청소년기 제 가치관을 형성해주셨죠.”

나이와 세대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만남은 스코필드 박사가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1970년 4월까지 이어졌다.

“사슴처럼 선한 얼굴로 ‘운찬’ 하고 부르셨는데 나이가 어린 저를 한 번도 하대한 적이 없을 정도로 예의와 품격을 지키셨어요. 그분을 만나는 동안 일생에서 배워야할 것의 대부분을 배웠어요.”

그에게 스코필드 박사는 한마디로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그는 스코필드 박사의 세 가지 가르침을 소개했다. 첫째 정직해야 하고, 둘째 정의로운 사람이 돼야 하고, 마지막으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특히 정의롭지 못한 강자들에 대한 비판 정신을 강조했다.

“약자들, 특히 선하지만 어려운 이들에게는 비둘기의 자애로움으로 대하고 강한 사람들, 무엇보다 정의롭지 못한 강자에게는 호랑이의 날카로움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호랑이의 날카로움이란 건설적인 비판정신이었지요.”

스코필드 박사는 196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대해서도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는다’고 개탄했다는 것이다.

정 전 총리가 ‘동반성장의 전도사’로 살게 된 것 역시 스코필드 박사의 영향이 컸다.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한 뒤 동반성장위원장을 맡았다. 물러난 뒤에도 독자적으로 ‘동반성장연구소’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그는 동반성장의 정신이 성경의 정의와 맞닿아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해부터는 전국 교회를 찾아다니며 강연도 하고 있다.

“레위기 19장 9∼10절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있어요. 포도농원에서 포도 딸 때 다 따지 말고 남겨서 행인들도 따갈 수 있게 하라고. 다른 곡식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룻기 2장 15∼16절에선 보아스가 가난한 룻을 위해 하인들에게 곡식 다발을 뽑아서 조금씩 흘리라고 이야기해요. 그런 걸 모두 스코필드 박사님한테 배웠어요. 기독교정신과 정의, 동반성장의 정신이 이렇게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극화가 심화된 상황에서 양심적 기독교인들이 동반성장을 위해 힘을 모아주면 좋지 않을까요.”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는 기독교인이다. 그를 교회로 이끈 것 역시 스코필드 박사였다. 가난한 형편에도 1년에 열 번씩 제사를 지내던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기독교인으로 살게 된 지도 56년이 됐다.

“스코필드 박사께서 등록금 대주면서 교회에 가라는데 어길 수가 있어야죠.(웃음) 지금은 아무리 바빠도 1년에 한두 차례 빼고는 주일예배를 꼭 드립니다. 연동교회, 남서울교회를 거쳐 남포교회를 섬기고 있어요. 예배만 드리지 봉사활동을 따로 못 해서 장로 선거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어요. 늘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살려고 노력은 합니다. 항상 성공한다고 볼 순 없지만.”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