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에 들어 늦겨울 정취에 젖다, 전북 무주 덕유산 눈꽃 기행

입력 2016-02-25 04:03
최근 내린 폭설로 전북 무주의 덕유산 능선에 만발한 하얀 눈꽃이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어 있다.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에서 한 탐방객이 설국으로 변한 장관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덕유산 눈꽃은 4월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데다 관광곤돌라를 이용하면 발품을 팔지 않고도 즐길 수 있어 인기를 얻고 있다.
설천봉에서 향적봉 가는 길이 눈꽃터널로 변해 있다.
설천봉 정상 상제루가 상고대로 덮여 있다.
봄기운이 서린다는 우수가 지나면서 남녘에서는 꽃소식과 함께 봄소식이 전해진다. 하지만 아직 ‘겨울왕국’을 이어가는 곳이 적지 않다. 해발 1614m 덕유산 정상 향적봉도 그렇다. 특히 이곳은 최근 내린 20㎝의 눈에다 새벽마다 몰려온 수증기가 얼어붙어 서리꽃이 더해지며 눈꽃(雪花)이 만발하다. 눈꽃이 수놓는 ‘하얀 나라’는 4월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관광곤돌라를 이용하면 1520m의 설천봉까지 쉽게 오른 뒤 20분 정도의 산행으로 향적봉에 다다를 수 있어 발품을 팔지 않고도 늦겨울 낭만에 젖어들 수 있다.

겨울에 멋진 자태를 뽐내는 눈꽃은 팔팔한 생기와 상서로운 기운을 전해줘 매력으로 다가온다. 국내 대표적 눈꽃 감상지로 꼽히는 덕유산 설천봉∼향적봉∼중봉에 이르는 정상부에는 눈부신 자연의 신비가 펼쳐진다. 백두대간의 한 줄기인 덕유산은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는 이름답게 정상인 향적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장중한 능선이 시원스런 풍광을 풀어놓는다.

사계절 아름답지만 특히 겨울산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큰 눈이 내린 뒤 바람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은 금방이라도 파란 잉크물을 쏟아낼 듯 청징하다. 금빛 햇살을 받아 안고 수정처럼 부서지는 눈꽃의 향연은 보석보다 더 영롱하다. 탐스러운 설화 사이로 펼쳐진 대간의 봉우리들도 운무 속 담채화를 그려놓은 듯 황홀경을 담아낸다.

겨울 덕유산 정상부근에는 자태가 멋들어진 설화·상고대가 수시로 피어난다. 온도 차이가 큰 날씨 덕분이다. 지리산 등 대부분의 산은 능선이 동-서로 이어지지만 덕유산의 주능선은 반도의 중앙에 북-남으로 뻗어 내렸다. 겨울철 서해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덕유산 능선에 부딪히며 수시로 눈 구름층을 형성한다. 눈구름은 많은 눈을 뿌리고, 능선을 흘러 다니며 주목과 고사목 등에 붙어 환상적인 상고대를 형성한다. 상고대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냉각되면서 나무 등에 얼어붙은 현상을 말한다.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얼어붙은 상고대는 얼음 왕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부를 만큼 장관을 연출한다.

덕유산리조트의 곤돌라 탑승장에서 시작한다. 곤돌라에 오르자 이내 짙은 안개 사이로 눈꽃을 피운 구상나무 군락의 군무가 이어진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이 펼쳐진다. 빛바랜 갈색으로 죽어 있던 산은 고도를 높이면서 화사한 은빛으로 살아난다. 10여분 뒤 곤돌라에서 내리면 이곳의 명물인 팔각정 휴게소 상제루가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맞이한다. 800여m 높이를 단숨에 구름을 뚫고 설천봉에 오른 것이다. 설천봉 정상 추위는 아래와 사뭇 다르다. 바람도 제법 거세게 불어 체감기온은 훨씬 떨어진다.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 나뭇가지에 만발한 눈꽃이 순록의 뿔처럼, 바다의 산호초처럼 엉켜 하늘을 가리고 있다. 상고대가 수정처럼 반짝인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순백의 향연 속으로 빠져든다. 구상나무, 신갈나무, 노린재나무, 자작나무들이 하얀 솜이불을 머리까지 끌어 덮었다. 거대한 솜사탕처럼 보인다. 천년풍상을 견뎌낸 주목도 마른 가지에 눈꽃을 입어 새 생명을 피웠다.

꿈속을 거닐 듯 하얀 설렘에 취해 걷다 보면 이내 향적봉이다. 사방이 막힘없이 트였다. 널찍한 터에 우뚝한 바위가 서 있는 향적봉은 좌우로 밋밋한 산세라 정상다운 맛은 부족하지만, 사방으로 펼쳐지는 파노라마 조망은 감탄을 쏟아내게 한다. 중봉에서 지봉을 거쳐 추풍령으로 내달리는 백두대간의 자태가 장엄하고, 천왕봉에서 반야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줄달음질쳐 나가는 지리산의 기운이 상서롭다. 빗살무늬로 뻗어나가는 굵직한 산세는 농도를 달리하며 수묵화를 그리듯 겹치고 포갠 채로 이어진다. 히말라야 산맥의 고봉들을 연상케 한다. 하얀 면사포를 쓴 순결한 신부의 자태를 한 설산의 풍광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자연의 경이다.

향적봉에서 남쪽으로 5분쯤 내려서면 매점을 겸한 대피소가 있다. 바람이 세지 않다면 야외 식탁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컵라면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중봉까지는 꼭 가 봐야 한다. 향적봉에서 중봉까지는 1.3㎞ 정도. 고원지대에 펼쳐진 주목군락의 설경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중봉에 서면 동엽령을 거쳐 남덕유로 뻗어 나가는 장쾌한 덕유산 능선을 볼 수 있다. 중봉에서 오수자굴로 내려가는 길 역시 눈꽃이 아름답다. 덕유산은 ‘하얀 눈의 휴식처’다.

여행메모

관광 곤돌라 주말 인터넷 예약제 도입… 등산은 8㎞ 백련사코스 3∼4시간 무난


덕유산에 가려면 통영대전고속도로를 이용해 무주IC에서 내린 뒤 30·19번 국도와 49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달리다 리조트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덕유산리조트에 닿으면 된다. 덕유산리조트는 관광객의 곤돌라 대기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터넷 예약제를 도입했다. 덕유산 향적봉에 오르기 위한 행렬이 길게 늘어서 주말이면 2∼3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홈페이지나 모바일로 탑승일자와 시간을 지정·예약하면 예약자 본인 휴대전화로 예약확정 문자가 발송된다. 당일 탑승시간 30분전까지 매표소에서 예약확정 문자를 제시 후 티켓을 받아 탑승하면 된다. 온라인 예약은 무주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와 모바일을 통해서만 1인 5매까지 가능하다. 요금은 왕복 기준 어른 1만2000원, 어린이 9000원. 운행시간은 겨울철 오전 9시∼오후 4시.

곤돌라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향적봉에 오르려면 삼공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는 백련사코스가 가장 무난하다. 삼공탐방지원센터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약 6㎞ 탐방로는 오르막이 거의 없어 평탄해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이후 향적봉까지 2㎞ 구간은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2시간가량 걸어야 하지만 산행시간이 비교적 짧아 큰 어려움은 없다.

제대로 눈 산행 맛을 보고 싶다면 향적봉에서 주능선을 따라 남덕유까지 종주하는 코스도 타볼 만하다. 종주코스는 12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웬만한 준족이라도 당일치기 산행으로는 버겁다.

덕유산(무주)=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