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주 여성, 악몽이 된 ‘코리안 드림’… 시아버지는 성폭행·남편은 혼인취소訴

입력 2016-02-23 04:00

베트남 여성 A씨(26)는 2012년 2월 국제결혼중개업자의 소개로 김모(41)씨와 결혼했다.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그해 7월 한국에 들어와 시부모와 함께 생활했다. 혼인생활은 불과 1년 만에 파탄이 났다. 시아버지이자 남편의 계부인 최모씨가 A씨를 성폭행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A씨가 시아버지를 유혹했다며 몰아붙였다. A씨는 2013년 1월 시아버지를 형사고소한 뒤 집을 나왔다.

시아버지는 징역 7년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 중 피해자인 A씨가 혼인 전 출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김씨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A씨가 출산 경험을 알리지 않고 나와 결혼했다”며 혼인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동안 아이를 낳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 시어머니의 질문에 A씨는 매번 부인했었다.

결국 A씨는 과거 성폭행 피해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열세 살 때 베트남에서 소수민족인 타이족 남성에게 납치됐었다. 그때 성폭행을 당해 임신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 남성이 자주 술을 마시고 폭력을 행사해 도망쳐 나왔고 출산한 남자아이는 남성이 데려간 뒤 교류가 끊겼다고 설명했다. A씨는 남편의 혼인취소 소송에 맞서 “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도 남편과 시어머니는 상처를 위로해주기는커녕 시아버지를 유혹했다고 몰아붙이며 사실상 유기했다”면서 이혼과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다.

1·2심은 남편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배우자의 출산 경험은 혼인을 결정할 때 중요한 고려요소인데 이를 알리지 않았고, 출산 사실을 알았다면 김씨가 혼인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민법 816조 3호는 ‘사기로 인해 혼인의 의사표시를 한 때’에는 혼인을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출산경력과 같은 혼인에 중대한 사안을 미리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은 경우도 포함된다. 2심은 A씨에게 책임을 물어 남편에게 위자료 300만원을 물어주라고 선고했다. 판결이 확정되면 혼인비자 연장이 불가능해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사기결혼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김씨가 A씨를 상대로 낸 혼인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전주지법에 돌려보냈다고 22일 밝혔다. 재판부는 A씨가 숨겨왔던 출산 경험이 성폭행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주목했다. 혼인취소 사유를 판단할 때는 출산 사실을 숨긴 당사자의 명예, 사생활 비밀의 보장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성장 과정에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폭행 피해를 당해 출산까지 했고 이런 출산의 경력과 경위는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며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을 곧바로 혼인취소 사유에 해당한다고 봐서는 안 되고, 이는 국제결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출산 이후 자녀와 곧바로 관계가 단절됐고, 이후 양육이나 교류 등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A씨의 주장도 고려됐다. 출산 사실 미고지를 혼인취소 사유로 인정해 왔던 그동안의 판례에서 대법원이 예외를 인정한 셈이다.

A씨는 대법원 선고 후 “그동안 두려움 속에 살았던 제게 공평한 결과를 주는 판결”이라며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성폭력으로 받은 고통이 지금과 미래의 고통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