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럽’을 주창하며 1993년 출범한 유럽연합(EU)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중동에서 불어닥친 난민 위기, 저유가와 신흥국 경제의 부진에서 태동한 글로벌 경제 불황의 심화가 EU 각국의 정치·경제·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면서 불협화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불거져 버렸다. 역내 자유통행을 보장, EU 통합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솅겐조약이 난민 범람을 막으려는 관련국의 국경 봉쇄와 맞물려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음에도 뾰족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여기에 ‘EU 안의 섬’과 같은 불안한 동거를 이어오던 영국이 EU를 벗어날지 모른다는 브렉시트(Brexit) 우려까지 시한폭탄처럼 자리해 있다.
19일(현지시간)까지 이틀간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브렉시트와 난민위기 대응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도출된 합의안은 영국이 요구한 EU 개혁안을 대폭 수용해 굴욕에 가까운 혜택을 주는 내용으로 이뤄졌다. 오는 6월 브렉시트에 대한 국민투표를 시행하기로 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로서는 양손 두둑이 선물을 안고 귀국길에 오른 셈이다. 문제는 브렉시트로 상징되는 유럽 통합의 태생적 한계와 현재의 총체적 난국이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EU 내에서 인구의 13%, 경제의 17%를 차지하는 영국이 EU에서 독립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가입국으로서 가지는 부담에 비해 혜택은 터무니없이 적다는 불만이다. 특히 EU 출신 이민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공공 재원이 소요된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집권 보수당의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인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조차 21일 언론에 EU 탈퇴를 찬성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같은 날 영국 경제계가 ‘EU 탈퇴 반대 성명’을 발표하면서 브렉시트를 놓고 국론 분열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유럽의 재정위기는 위기 당사국들의 과다한 복지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 재정운영이 방만해진 데서 출발했다. 더불어 재정위기의 근간에는 유로존의 통합 당시 회원국들 사이의 경제 체질이 천차만별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유로화를 도입해 통합을 강행하면서 구성원들의 경제적 건전성과 대외경쟁력이 점점 더 벌어져버린 문제점도 자리한다. 경쟁력이 높거나 시장이 큰 독일, 네덜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의 성장에 비해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은 뒤떨어지는 경쟁력에 물가까지 높아 적자는 누적되고 채무가 증가하면서 대규모 부채에 허덕이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경제적 불안정성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최근 몇 년간 엄청나게 확대된 난민 위기 여파는 유럽의 균열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안 그래도 이주의 자유를 틈타 동구권 국가에서 넘어오는 저소득층 이주민들에 대한 불만이 북서부 유럽국들에 팽배한 상황에서 중동 이주민들까지 수십만명 단위로 가세하자 사회적 혼란에 대한 우려와 부정적 여론이 폭발하고 있다. 브렉시트에 대한 강행 여론 역시 이 같은 우려에 상당부분 기반하고 있다.
브뤼셀 정상회의에서도 이 같은 구성국들의 불만 기류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했으나 뾰족한 해법을 도출하지는 못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솅겐조약이 없으면 유럽도 없다. 보전을 위해 EU 외부 국경통제가 필요하다”며 공감대 형성을 호소했다. 하지만 조약 유지를 위한 미봉책을 솅겐조약의 기본 틀인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통제를 통해 구현한다는 아이디어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역시 난민 유입 제한과 국경통제를 재강화하는 등 국경 봉쇄 기조는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이다.
경제문제뿐 아니라 난민 대책에서도 EU 지도부 및 선진국과 동유럽 국가들의 대립각은 커져가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발칸루트’를 완전 차단하라고 요구하며 사실상 그리스의 솅겐조약 퇴출을 요구하고 있으나 EU는 이에 난색을 표하면서 그리스의 국경 통제를 압박하는 정도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EU의 중심축으로 든든히 자리했던 독일과 그 수장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난민 위기 대처과정에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는 점도 커다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과의 합의에서도 일방적일 정도로 영국의 의견을 대폭 수용한 데는 “EU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영국의 탈퇴가 가지는 상징성에 비춰볼 때 또 다른 국가들의 연쇄 탈퇴 움직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분석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현실화 땐 英→EU→글로벌 경제 후폭풍 도미노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저지를 위한 영국과 EU의 합의안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EU 탈퇴가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경제에 미칠 영향은 엄청날 전망이다. ‘하나의 유럽’ 붕괴라는 정치적 파장 이상으로 영국 시장뿐 아니라 EU와 세계 경제에 각종 후폭풍을 야기할 중대변수로 작용할 것이 자명하다.
가장 먼저 위험성이 증폭될 분야로는 주식과 환율시장이 꼽힌다. 글로벌 투자은행 스테이트 스트리트가 최근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40% 가까운 응답자들이 영국 증시의 폭락을 전망했다. 그 다음으로 피해가 클 대상으로는 영국 파운드화와 유로화가 각각 지목됐다. 특히 파운드화의 경우 미국 달러화 대비 10%가량의 평가 절하, 유로화도 비슷한 정도의 폭락을 초래될 가능성이 있어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며, 영국의 마이너스 금리 도입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실제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이 브렉시트 지지를 선언한 영향으로 22일(현지시간) 달러 대비 파운드화 가치가 한때 1.6% 떨어져 1년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제조업 및 서비스업에서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것은 EU 체제를 떠나는 영국이겠지만 그 후폭풍은 연쇄적으로 유럽 자유시장을 강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 싱크탱크인 ‘오픈유럽’은 EU 대상 수출이 꾸준히 감소세를 보이는 영국이지만 브렉시트가 현실화될 경우 각종 관세와 무역장벽에 직면하면서 유럽 내 수출이 현재의 47% 정도에서 30% 수준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영국 국내총생산(GDP)에도 영향을 미쳐 최악의 경우 마이너스 2.2% 성장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EU 내부 통계로 잡히던 영국 해외 수출 등이 분리되면서 유로존의 GDP 거품이 빠지고 축소돼 저성장을 더 고착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브렉시트의 현실화가 몰고 올 또 다른 리스크는 EU 내 빈부격차 심화를 주시하고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연쇄 이탈이다. 자국 통화 부활을 통해 경제회복을 노린 그리스의 좌파 정부가 시도했던 ‘그렉시트’는 지난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북유럽의 핀란드에서도 유로존 이탈 논의가 현재진행중이다. 수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북유럽의 강소국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심각한 경제난을 앓고 있는 핀란드에서는 유로존 이탈에 대한 지지 목소리가 높다.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있는 영국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영국이 연착륙에 성공할 경우 핀란드를 비롯해 포르투갈 등 위험 국가들의 연쇄 동요가 우려된다.
반면 브렉시트에 관한 대부분 진단이 경제 문제에 집중된 것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유로존의 탈퇴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문제이며, 경제 해방이나 화폐 복원의 차원이 아니다”라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이미 유로존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 중인 영국 입장에서 브렉시트의 경제적 파급은 우려만큼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가디언은 지난 20일자 칼럼에서 “브렉시트는 경제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바보들아”라고 신랄하게 비꼬면서 “향후 몇 달간 계속될 브렉시트의 경제적 영향에 대한 신경질적인 주장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고 권했다. 국경과 난민 위기, 이민자 문제 등 브렉시트를 야기한 배경에 집중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
[월드 이슈] ‘하나의 유럽’ 23년 만에 분열 위기
입력 2016-02-23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