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국민소설’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앵무새 죽이기’의 저자 하퍼 리(사진)가 지난 18일(현지시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장례식은 평소 그의 바람에 따라 조카 등 가까운 친척과 친구 40명 정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20일 고향인 앨라배마주 먼로빌의 감리교회에서 치러졌다. 부모와 언니가 묻힌 인근 묘지에 안장됐다.
리는 1926년 4월 28일 변호사이자 주의원을 지낸 아마사 콜맨 리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앨라배마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중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49년 뉴욕으로 떠났다. 항공사 예약창구 직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던 그는 60년, 데뷔작 ‘앵무새 죽이기’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유명세를 떨쳤다.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앵무새 죽이기’는 30년대 앨라배마의 한 소도시에서 벌어진 흑인차별 실태를 어린 소녀의 눈으로 낱낱이 고발한 작품이다. 화자인 여섯 살 소녀 진 루이스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가족이 위협당하는 가운데서도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누명을 쓴 흑인 남성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정의로운 변호사의 표상으로 그려졌다. 원래 57년 ‘애티커스’란 제목으로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던 리는 당시 편집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재집필했다고 한다.
‘앵무새 죽이기’는 이후 미국 학교마다 필독서로 자리매김했고 62년 영화로 제작돼 주연인 그레고리 펙에게 오스카상까지 안겼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4000만부 이상 팔렸으며 20세기 미국인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에 속한다.
하지만 작품이 유명해진 후 리는 60년대 후반부터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2007년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받기 위해 잠깐 공개석상에 나서긴 했지만 다시 세상을 등졌다.
그는 지난해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편인 ‘파수꾼’을 출간하며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집필됐지만 내용은 20년 뒤에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속편 성격이다. 55년 만에 두 번째 책이 출간되는 것이어서 리가 진심으로 출판을 원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특히 핀치 변호사가 늙은 인종주의자로 등장해 평단과 독자들에게 실망감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며 리의 위상을 새삼 확인시켰다. 현재 관심을 모으는 것은 수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리의 유산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수주일 내에 유언장이 공개될 예정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하퍼 리 별세… ‘앵무새 죽이기’로 편견에 경종
입력 2016-02-21 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