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시각장애 소녀 위해 점자책 만들어 한글 교육

입력 2016-02-22 17:54
로제타가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책으로, 사진은 첫 장의 영어 서문. 봉래가 점자책을 많이 읽어서 맨질맨질 해졌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로제타와 평양맹학교 졸업생들. 하희정 박사 제공

로제타는 의사였지만 교육 분야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의학을 공부하기 전엔 결혼하지 않고 평생 교사로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그 꿈대로 고향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독립된 삶을 꿈꾸던 중산층의 젊은 여성들에겐 교사만큼 의미 있고 안정된 직업은 없었다. 로제타가 의료 활동을 펼치면서 단순히 환자 개개인을 치료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선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의료인 양성에 힘을 쏟았던 것도 교육에 대한 남다른 견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시각장애인 소녀와의 약속

하지만 로제타의 선견지명은 단순히 교육적 식견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한 영혼의 가치가 천하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작은 아픔도 지나치는 법이 없었던 몸에 배인 사랑이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한 원천이었다. 여기에 남보다 뛰어난 관찰력과 매사에 일을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처리하는 그녀의 성품이 더해졌다.

조선에서 장애아들을 위한 특수교육을 처음 시도한 것도 로제타였다. 조선은 장애를 가진 이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사회였다. 어디를 가나 조롱과 멸시가 이들을 따라다녔다. 특히 시각장애를 가진 소녀들은 가족에게 버려지거나 잘 해야 점쟁이나 무당이 되었다.

로제타는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들이 운명처럼 겪어야 할 고통과 아픔의 세월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시작은 1894년 봄 평양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만났던 초기 기독교인 오석형의 딸 복녀로부터였다. 그녀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발음이 어려웠는지 로제타는 그녀를 봉래라고 불렀다. 어릴 때 잠시 배운 점자교육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봉래에게 점자교육을 시도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로제타는 봉래에게 글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결국 남편을 잃은 아픔 속에서도 미국에서 한글에 적합한 점자방식을 찾아냈다.

1897년 한양으로 돌아온 로제타는 기름을 바른 한지에 바늘로 점을 찍어 한글입문서와 한글기도서, 십계명을 점자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평양으로 돌아와 봉래에게 새로 만든 교재로 점자교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글을 익히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일 년 만에 봉래는 로제타가 준비한 모든 교재들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로제타는 그에게 자립기반이 될 수 있는 바느질과 뜨개질까지 가르쳤다. 그의 교육방식은 한 개인의 성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에스더를 조선의 여의사로, 봉래를 특수교육의 첫 교사로 계획하고 가르쳤다. 그의 보고서 내용이다. “훗날 맹아들의 교사로 일하게 하려고 봉래를 계속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 행복해 합니다.” 그의 비전대로 봉래는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돌아왔고, 1918년 열병으로 사망하기까지 조선의 첫 특수교사로 맹아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



특수교육으로 확대되다

앞을 볼 수 없는 아이가 눈을 뜨고도 하기 어려운 읽기와 쓰기, 바느질과 뜨개질까지 거뜬히 해내자, 사람들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본 듯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적 아닌 기적을 두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은 시각장애 소녀들을 하나 둘 소개하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1900년 1월 소녀 네 명을 데리고 어린이 병동의 한 방을 교실로 삼아 맹아교육을 시작했다. 3년 후에는 감리교에서 세운 정진여학교에도 맹인반을 개설했다.

특수교육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06년 광혜여원과 어린이병동이 화재로 전소됐다. 로제타는 맹인반을 정진여학교로 옮겨 함께 교육했다. 미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에서 한 부인이 기금을 보내왔다. 덕분에 맹인소녀들을 위한 특수교실과 기숙사가 마련되었다. 감리교 선교부도 로제타를 평양맹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네이선 록웰 선교사를 파송해 돕도록 했다. 로제타는 맹아들을 고립된 공간에 가두어 교육하지 않았다. 분리된 공간에서 기초교육을 한 후에는 비장애 학생들과 어울려 함께 공부하고 놀도록 이끌었다. 더불어 살면 그 어떤 부족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는데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그에겐 모든 과정이 교육이었다.

로제타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으로 영역을 넓혔다. 먼저 이익민과 그의 부인을 중국 치푸에 있는 농아학교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이 학교는 예전에 로제타가 남편 윌리엄 홀과 함께 신혼여행을 갔다가 둘러본 곳이었다. 1910년 정식으로 개교한 농아학교는 여학생을 대상으로 했던 맹아학교와 달리 남녀공학으로 출발했다. 이익민 부부가 공부를 끝내고 돌아와 첫 교사가 되었다.

특수교육에 대한 로제타의 열정은 국제적 연대로 확대되었다. 1914년 8월, 동아시아의 특수교육 전문가들을 평양 모란봉으로 초대해 국제회의를 조직하고 첫 모임을 열었다. 일본 만주 중국에서 온 특수교육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처음으로 국제적 연대를 다지며 선한 의지를 확인하고 협력하기로 논의했다. 로제타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절망만이 가득 차 있던 조선에서 동아시아 어느 나라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주도하며 조선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당시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던 아들 셔우드 홀은 어머니의 일을 돕기 위해 소책자까지 펴냈다.

로제타가 특수교육을 국제적 연대로 확장시킨 것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사사로운 동정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특수교육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밝혔다. “맹아들과 농아들을 가르치려면 각 나라의 풍습과 조건들의 차이를 연구하고 조사해야 한다. 대표자들이 이런 문제들을 놓고 토론하는 것은 직접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회적 경제적 활동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인류의 공익을 위해 큰 가치가 있다.” 경계를 넘어서는 인류애로 국제적 연대를 이끌어냈던 로제타는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희정 박사<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