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입력 2016-02-19 17:31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적 폐해를 적나라하게 겪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본의 이익을 위한 소모품 정도로밖에 취급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떤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일꾼들을 불러다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가족의 통상 하루 일당입니다. 율법에 따라 노동자들이 굶지 않도록 그날 임금은 꼭 그날 저녁 지급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품꾼들을 데려다 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장터에 나가 사람들을 더 데려다 씁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도 일거리가 없는 사람이 숱하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오전 9시와 12시, 오후 3시와 5시 네 차례 더 품꾼을 데려다 일을 시킵니다. 의로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품삯을 나눠주면서 상식을 엎어버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가장 일반적인 정의의 원칙은 기여에 따른 분배의 원칙, 비례적 정의론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기이한 정의론을 내세웁니다. 주인이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모든 일꾼에게 최저생계비에 해당하는 만큼 공평하게 임금을 지급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어진 물질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 하는 경제적 원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관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업적에 상관없이 존엄한 존재로서 품위를 유지하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정의의 요체입니다. 인간적 업적 여하에 따라 삶에 차등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성서적 정의, 곧 하나님의 정의가 본문 말씀에 선명히 제시돼 있습니다. 조건이나 업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인정받는 현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본문 말씀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묘한 여운을 남기는 교훈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 사이의 근본적 관계 변화를 말합니다. 먼저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모두 동등하게 되는 현실을 말합니다. 기득권에 따라 당연히 더 많은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그 통념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케 함으로써 그 진실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합니다.

단순한 역전이 아니라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일용할 양식을 누리며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 관계, 사회적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이뤄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현실은 하나님을 가운데 모시고 둥글게 둥글게 춤추는 현실입니다. 세상의 질서에서는 기회의 차등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함께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서 바로 그 삶을 구현하라고 사람들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나중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삶을 보장하는 거기에 따사로운 평화가 이뤄지리라는 믿음을 갖고 함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