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의 컬처 토크] 우리에게도 ‘그래미상’이 있어야 한다

입력 2016-02-19 18:07
미국 팝 문화에서 한 해를 결산하는 시점은 그래미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2월이다. 시상식의 의미는 누가 상을 받았냐는 것보다 최근의 문화 동향을 결산하고, 대중문화 콘텐츠를 역사적 기록으로 전수해주는 것이다. 이 두 시상식이 없다면 수많은 좋은 노래나 영화가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의 중요한 시점마다 상징, 풍습, 일자를 지정하며 후대가 하나님의 역사를 망각하지 않도록 기념했다. 이를 통해 지금의 사건은 역사가 돼 현재진행형의 유산이 된다.

지난 15일 열린 제58회 그래미 시상식을 지켜보며 국내에 이런 권위 있는 시상식이 없다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연말 시상식들은 각 방송사와 연예기획사의 이해관계로 소위 ‘나눠먹는’ 잔치에 불과하다. 2월 29일 열리는 ‘한국대중음악상’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제정된 의미 있는 시상식이다.

기독교계는 더욱 심각하다. 기독교인들의 문화 콘텐츠가 많이 발표되지만 권위 있는 시상식은 거의 전무하다. 현대기독교음악(CCM)은 이제 몇몇 워십음악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다. 일부는 이것이 예배에 집중하고 있다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음악이 점점 예배 안으로만 축소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다양성 상실! 이는 기독교문화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총체적 문제점이다. 이번 그래미 시상식은 대중성과 백인중심주의라는 보수성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악적인 다양성이 살아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음악인들에 대한 트리뷰트 무대는 전통과 새로움의 공존을 멋지게 보여줬다.

아쉬운 점은 거의 모든 매체에서 지난해 최고의 작품으로 극찬 받았던 캔드릭 라마(Kendrick Lamar·사진)의 ‘투 핌프 어 버터플라이’(To Pimp A Butterfly)가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으로 뽑히지 못한 것이다. 라마의 앨범은 여전히 만연한 인종차별과 사회적 편견에 대한 치열한 비평을 담아냈다. 또한 흑인으로서 뿌리와 처절한 자성을 뛰어난 랩핑과 프로듀싱으로 이끌어낸 최고의 작품이다.

시상식에서도 그는 과거의 흑인 노예 억압과 현재적인 공권력의 폭력을 절묘하게 링크시킨 멋진 공연을 보여주었다. ‘최우수 랩 음반상’을 수상하며 그는 말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게 책임감을 심어주고, 이 자리로 이끌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여러 유혹에 빠질 위험이 많은 어린이를 이끌어 주는 좋은 사람들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그는 음악적 역량 발현과 상업적 성공 이상의 목표와 비전을 수상소감에서 표명했다.

그래미 시상식에도 ‘최우수 CCM’ 부문이 있다. 다른 상들은 록, 힙합, 재즈 등 다양한 음악 장르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CCM’상은 음악이 아니라 메시지에 따른 독립된 분야이다. CCM이 지향하는 ‘동시대성’(Contemporary)은 음악 스타일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향한 기독교인 책임과 비평의식을 담은 메시지도 포함한다. 즉 탐욕과 방종의 시대에 대한 비판과 그 안에 고통당하는 자들의 아픔과 고민, 그리고 인류애적 사랑과 위로를 진솔하게 담아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아름다운 생각과 음악적 역량을 가지고 활동하는 크리스천 음악인이 많다. 문제는 그들이 교회와 매체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려면 기독교계에도 성숙한 비평가들의 활동과 매체의 주목이 필요하다. 비평은 단지 문화의 순위를 매기는 작업이 아니라 좋은 문화를 찾아내고 그 안에 담긴 가치를 인정하고 대중들에게 널리 소개하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시상식은 이런 ‘보석’을 알리고 기억하는 중요한 기회이다. 국내 기독교 문화계에도 귄위 있는 시상식이 있어야 한다.

윤영훈 <빅퍼즐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