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 사생활도 보호 대상인가… 불붙은 애플 ‘아이폰 보안 논쟁’
입력 2016-02-18 21:05
미국 정부와 ‘IT 공룡’ 애플이 아이폰의 잠금해제 기술을 수사기관에 제공하는 문제를 놓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샌버나디노 총기난사 테러 용의자의 아이폰을 열 수 있도록 협조하라는 미 연방법원의 요청을 17일(현지시간) 애플이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국가안보 대 사생활 침해’라는 화두를 두고 두 거대 권력에다 정치권까지 뒤엉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팀 쿡은 이날 ‘고객들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미국 정부는 고객 보안을 위협할 수 있는 전례 없는 조치를 우리에게 요구했다”며 연방법원의 ‘백도어’(뒷문·보안체계 우회 기술) 제공 명령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쿡은 백도어를 실생활에서 ‘수억 개의 자물쇠를 딸 수 있는 마스터키’에 비유하면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샌버나디노 사건의 용의자인 사이드 파룩이 사용한 아이폰5C의 보안체계를 뚫지 못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6자리 암호의 모든 조합을 입력하는 데 최대 144년이나 걸린다”며 애플의 보안체계가 놀라울 만큼 강력하다고 전했다.
아이폰에는 복잡한 암호인식 연산장치뿐 아니라 암호를 10번 넘게 틀리면 개인자료가 자동 삭제되도록 하는 사생활 보안 설정도 존재한다. 더구나 암호를 계속 잘못 넣을 경우 일정시간 입력이 불가능하도록 설정돼 해독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연방법원은 FBI의 요청에 따라 “외부도구를 통한 암호 반복입력 소프트웨어, 입력 지연 제거 등의 백도어 기술을 제공하라”고 애플에 명령했다. FBI를 비롯한 미국 정부의 수사기관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애플의 보안체계에 백도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IT업계와 다수의 사용자들은 보안체계를 한 차례 무너뜨리는 것 자체가 법률문제를 넘어 사이버 보안에 ‘치명적인 선례’가 될지 모른다며 반대해 왔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CEO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사법기관이 정보에 접근하는 것과 고객의 기기를 해킹해달라는 요구는 전혀 다르다”며 지지를 표명하는 등 실리콘밸리 업체들은 애플의 편을 들고 있다.
졸지에 업계 대변인 격이 된 애플이 단호하게 반응하자 공화당 대선 선두주자인 도널드 트럼프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법원명령에 100% 동의하며, 애플은 당연히 잠금장치를 해제해야 한다”고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뉴욕타임스 등은 “정부와 트럼프 등 보수 정치인들의 압박”을 언급하며 정치 쟁점화를 문제 삼았다. 미 법무부와 백악관 측은 “문제의 휴대전화 하나를 여는 데 국한된 문제”라고 진화하면서도 재차 설득에 나섰다.
영국 가디언은 “이번 논란이 중국과 러시아 등에 영향을 미칠 위험이 크다”고 분석했다. 상대적으로 정부권력이 막강한 이들이 그간 테러방지법 강화 등을 이유로 업계에 보안 접근 해제 및 백도어 제공을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개인정보 보호’의 빗장을 먼저 열어젖힐 경우 애플이 권위주의 국가의 공권력을 더는 견딜 방법이 없어진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