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주의 1318 희망공작소] 부모의 분노와 격노

입력 2016-02-19 20:03

살아 있다면 중학교 2학년, 꽃다운 여중생이 되었을 아이가 자신의 집에서 백골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부모였고, 가출했던 아이를 장시간 때렸는데 다음날 보니 죽어 있더라는 설명이다. 시신을 집안에 1년 가까이 방치한 것도 엽기적이지만 아버지란 사람이 그동안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등 현직 목사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어떻게 부모가 자기 아이를 죽도록 때릴 수 있단 말인가. 목사, 아니 인간으로서 어떻게 바로 옆방에 누워 있는 시신을 이불로 덮어놓고 태연히 살아갈 수 있었을까. 성경을 가르치는 손이 동시에 자식을 죽이는 손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 바른길로 훈계하려는 부모의 행동이 아이를 병들게 하고 심지어 죽게 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다.

많은 부모들이 ‘사춘기 아이가 너무 미워서 이성을 잃고 때린 적이 있다’는 고백을 종종 한다. 이성적으로 조절이 가능한 분노를 넘어 어느 지점에서 조절력을 잃는 격노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체폭력만이 아니라 언어·정서폭력도 포함된다.

심리적으로 분노와 격노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존재한다. 그 경계에는 부모가 의식하지 못하는 두려움과 상처, 불안이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의 실패를 두려워하는 부모의 경우, 그 두려움을 자극하는 아이의 행동에 조절력을 잃고 격노에 휩싸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했던 상처가 있는 부모는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경계를 넘어서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스스로의 상처와 불안이 점화되는 지점을 의식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아이를 죽이는 폭력을 키워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두려움과 결점의 그림자가 있다. 부모의 바람과 반대로 가는 듯한 사춘기 아이의 행동은 부모의 정직한 자기직면을 요구하는 신의 부르심일 수 있다. 아이들의 천사가 그분을 항상 뵙고 있기 때문이다(마 18:10). 인간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섬김으로써 구원을 받으며, 자녀를 키움으로써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져 간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기의 통합’이라고 부른다.

목사인 그 아버지가 고의로 계획적인 살인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면의 그림자를 자신의 일부로 통합하지 못하고 사춘기 아이에게 그대로 전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출’이라는 악행을 훈계한다는 미명 하에 자신의 그림자를 죽도록 징계했을 것이다. 자녀의 ‘악행’이 오롯이 아이의 문제라고 생각한 나머지 집안의 방치된 시신으로부터 자신의 책임과 외부활동을 분리하는 해리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부모가 자신을 제대로 직면하고 통합하지 못하면 결국 아이가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가슴 아프게 되새겨 본다.

한영주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15세상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