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집애가 무슨 공부냐며 아버지가 책 아궁이에”… 83세에 초등학교 졸업하는 강옥준 할머니 스토리

입력 2016-02-17 20:26 수정 2016-02-18 00:25
양원초등학교 졸업예정자인 강옥준 할머니가 17일 서울 마포구의 학교 교실에서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는 통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사연,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얘기 등을 풀어내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해방 이후 당시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살던 열대여섯 살 소녀 강옥준은 수시로 땅속에 들어가 빼빼 마른 몸을 웅크리고 숨죽였다. 부모가 딸을 지키려고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야산에 파놓은 굴이었다. 마을에서 5리(약 2㎞)쯤 떨어진 서삼릉에 미군이 주둔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여자들을 잡아갔다. 숨바꼭질 술래라도 되는 양 집집마다 뒤져 여자를 찾았다. 쪼그만 것도 여자라면 끌고 가서는 강간하고, 방생하듯 돌려보냈다.

미군 오는 날

미군이 온다는 말이 들리면 부모는 황급히 딸을 굴로 데려가 숨기고 입구를 풀로 덮었다. 저녁에 한 번 어머니가 와서는 밥과 김치를 넣어줬다. 미군은 대개 낮에 왔지만 밤에도 와서 뒤질 때가 있어서 굴에 한 번 숨으면 늦게까지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10촌 여동생도 다른 곳에 숨었지만 들통나 끌려갔다. 강옥준보다 나이가 어렸는데도 미군들은 기어이 잡아가서 그 몹쓸 짓을 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살아있다는 것으로 겨우 위안을 삼았다. 총을 멘 미군들이 전쟁포로 끌고 가듯 여자를 앞세우고 데려가면 다들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했다.

굴속은 다리만 겨우 뻗을 정도였다. 강옥준의 키가 140㎝나 됐을까. 들킬까봐 혼잣말도 못했다. 요강 하나만 끼고 앉아 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어둠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기다릴 뿐이었다. 하염없는 갑갑함보다 ‘잡혀가면 죽는다’는 공포가 더 컸다. 숨지 않아도 된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그냥 끝났다.

그 나쁜 한국놈

더 어렸던 일제 강점기에 여자들은 일본으로 끌려갔다. 지금 와서는 일본군 위안부를 자발적 참여자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는데 당시를 기억하는 강옥준은 “속아서 가지 누가 그런 줄 알고도 자발적으로 가느냐”고 코웃음을 친다.

물정 모르는 여자들을 그렇게 속여서 군수품 나르듯 일본으로 실어간 게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인이었다. 가난한 그 시절엔 들판에 막 돋아난 쑥을 뜯어다 멀겋게 죽을 쒀 마셨다. 그마저도 많이 먹지 못했다.

아버지는 장독 3개에 쌀을 채워 마당에 묻어놓고 끼니 때 꺼내 먹었다. 당시 마을에선 밥할 때마다 쌀을 한 숟갈씩 떠서 모아놨다가 일본 당국에 내야 했는데 어머니가 그걸 잊은 적이 있었다. 일본인을 대신해 쌀을 받으러 온 남자는 땅속에서 쌀을 퍼내는 것을 보고는 당국에 일러바쳤다. 결국 다 뺏겨서 식구는 굶어죽을 뻔했다. 그땐 그런 한국인이 많았다.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만 나쁜 놈이 아니다.

계집애가 공부는 무슨

강옥준은 해방 전 일본인이 하는 간이학교를 다녔다.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동그란 딱지 10장을 나눠주고는 한국말을 하면 하나씩 뺏었다. 모두 뺏기면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그 학교를 1년쯤 다녔을 때 해방이 됐다. 이후 국민학교를 갔는데 아버지가 “기집애(계집애)가 공부는 해 뭐 하느냐”며 책을 전부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그러다가 여자도 한글은 배워야 한대서 야학을 다녔다. 그때 배운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면 누렇게 익은 벼를 어찌 대하리’ ‘돼지 놓고 똬리 놓고 이응자도 모른다면 말갛게 고인 물을 어이 대하리’ 이런 식으로 배워서 한글을 깨쳤다.

곧 전쟁이 나서 피란을 떠났다. 한겨울 홍역에 걸려 죽은 오빠의 딸을 천에다 둘둘 말아 어느 방공호에 놓고 왔다. 전후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넘어온 남자와 결혼했다. 6살 많았던 남편은 대장암으로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5년 전 여든이 다 된 나이에 다시 학교를 찾았다. 노인들 모아놓고 약 파는 곳에서 서울 마포구 양원초등학교를 알게 됐다. 야학으로 배운 한글 덕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밤낮 우등생을 했다. 오는 23일 졸업을 한다.

17일 양원초등학교에서 만난 83세의 강옥준 할머니는 “공부가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어리고 젊을 적엔 힘들고 무서운 세상이었는데 이 시간은 아주 행복하다”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