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2월 19일] ‘죽었더라’와 ‘데려가심’

입력 2016-02-18 17:43

찬송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491장(통 543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5장 18∼27절

말씀 : 창세기 5장에 아담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족보를 통해 죄를 지은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몇 년을 살았든지 모두 “죽었더라”로 마감됩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이 “죽었더라”가 비껴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3절).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기와 같은 죄인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 닮은 아들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이었지만 죄를 지은 결과 그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죄가 그대로 그 아들에게 유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이 죄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그 결말은 모두 죄의 결과인 “죽었더라”입니다. 므두셀라는 969년 동안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기록되었지만(27절) 그도 결국 죽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생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보겠다며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아담은 죄를 모든 인류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이렇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5장에 반복되는 “죽었더라”가 비껴간 유일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에녹입니다(21∼24절). 그만 유독 “죽었더라”가 없습니다. 왜 그런 특별한 은혜가 임했을까요? 그는 4장에 등장했던 가인의 아들과 이름은 같지만 삶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려 삼백년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특별한 뭔가를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5장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단순하게 “자녀를 낳았으며”라는 것이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의 전부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거나 또 평생 독신으로 살며 뭔가 특별해 보이는 모습으로 살아야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분과 같은 생각, 같은 방향, 같은 꿈을 갖는 것입니다. 먹지 말라면 먹지 않는 것이 동행입니다. 그분이 싫어하면 나도 싫고 그분이 좋은 것은 나도 좋은 그런 삶이 동행입니다.

에녹이 5장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과 다른 것은 이것입니다. 그에게는 “죽었더라”는 표현이 없는 것입니다. 데려갈 곳이 공간적으로 분명히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죽음 앞에서 당황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데려가심’을 기쁨으로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 :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죽음이 아닌 하나님의 ‘데려가심’을 입을 영생을 얻은 사람답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관선 목사(서울 산정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