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영석] 엎질러진 물, 반이라도 담자

입력 2016-02-17 17:22

2013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북한은 그해 3월 8일 판문점 연락채널을 단절했다. 같은 달 26일에는 ‘1호 전투태세’ 진입을 선포했다. 4월 8일 대남 관계를 총괄했던 김양건 북한 노동당 비서가 개성공단에 등장했다. 누구도 예상 못한 ‘개성공단 사업 잠정 중단’ 카드를 꺼냈다. 북측 근로자 전원을 데리고 떠났다. 그로부터 1039일이 흐른 2016년 2월 10일,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 결정을 내렸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1039일이라는 간격 속에 두 사건의 상황은 다른 듯 비슷하다. 상황 설정 주체는 모두 북한이다. 2013년 봄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지난달 6일 수소탄 실험 도발을 감행했다. 지난 7일에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나 두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은 180도 다르다. “약속을 어기고 개성공단 운영을 중단시키면 북한에 투자할 나라와 기업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북한발(發) 개성공단 잠정 중단 선언 다음날인 2013년 4월 9일 박 대통령의 발언이다. “매우 실망스럽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틀 뒤 박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곧바로 거부했지만 박 대통령은 끊임없이 대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결국 그해 8월 14일 개성공단 정상화를 이끌어냈다. 중단 133일 만의 성과였다. 야당까지 ‘원칙의 승리’라며 환영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 16일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섰다. “외화 유입을 차단해야만 하는 엄중한 상황”이라며 남한발 개성공단 중단 선언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북한의 체제 붕괴까지 언급했다.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엔 일관된 원칙이 보이지 않는다. 2013년 남북 합의서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라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우리 정부 스스로가 약속을 먼저 어겼다는 빌미를 북한에 제공한 셈이다.

홍 장관의 ‘개성공단 자금 전용 자료’ 발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 논란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몸에 휘감는 우를 범했다. 국제적 망신이다. 한 발 더 나아가 홍 장관은 ‘셀프 말 바꾸기’로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린 것은 물론이다.

이런 탓에 박근혜정부 집권 기간 남북 경협은 물 건너갔다는 전망이 대부분이다. 남북 교류가 아버지 박정희정부 이전으로 후퇴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남북 간 군사 대결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개성공단이 아니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다. 정부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쏘던 날 사드 도입 논의 카드를 덜컥 꺼냈다. 중국도 이해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보탰다. 과연 그럴까.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12일 ‘항장무검 의재패공(項莊舞劍, 意在沛公)’이라는 고사성어를 던졌다. 사드가 중국(유방)을 살해하려는 미국(항우) 측의 칼춤이라는 비유다. ‘사드 절대 반대’라는 것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중국의 군사적 대응이 아니라 경제적 보복이다. 지난해 중국 수출액은 1452억 달러, 흑자는 552억 달러(66조원)다. 이 중 10%만 줄어도 연간 7조원이 날아간다.

정부는 이제 조금은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 가운데 반이라도 컵에 다시 담아야 하는 순간이다. 박근혜정부 집권 기간 내 개성공단 재가동은 쉽지 않겠지만 조그마한 남북 교류의 바통이라도 차기 정권에 넘겨줘야 한다. 사드 역시 충분한 논의 시간을 가지면서 중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외교적 전략이 필요하다. 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라 냉정을 찾을 때다.

김영석 정치부장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