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앞둔 거리 풍경이 으레 그렇듯 요즘 각 정당의 홍보 현수막이 가로수·가로등·전신주의 성긴 틈을 메우고 있다. 저기압의 영향에 비와 눈이 내린 지난 주말, 10㎡ 천에 새겨진 15자 안팎의 문구들은 바람을 버티느라 분주했다.
그 고생을 모르는지 거리의 시민들은 빨강·파랑·보라·노랑 색동옷을 입은 현수막을 등지고 걸음을 재촉했다. 간혹 너그러운 이들만 힐끔 눈길을 줄 뿐이다. 청년실업을, 노동개혁을, 누리과정을 목청껏 외치는 현수막의 ‘연설’을 시민들은 어떻게 듣고 있을까.
“저도 일 좀 하게 해주세요”
국회의사당이 자리 잡은 여의도 거리 곳곳에선 새누리당의 붉은 현수막이 눈길을 잡았다. ‘박근혜정부가 일 좀 하게 해주세요.’ 간곡한 부탁이 허공 높이 떠 있었다. 사사건건 발목 잡는 야당 때문에, ‘식물국회’ 만드는 국회선진화법 탓에 정부여당이 제 일을 못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을 게다. 새누리당은 설을 앞두고도 ‘새해에는 경제 먼저, 민생 먼저’라는 현수막을 전국에 내걸고 경제·민생 정당 이미지를 드러내려 애썼다.
겨울방학을 맞아 여의도의 한 증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는 대학생 최모(23·여)씨가 보행신호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내걸린 현수막에 시선을 줬다. 올가을 코스모스 졸업을 하려 한다는 그는 조금이라도 ‘스펙’을 쌓아볼 요량으로 생각지도 않던 증권사 인턴 자리를 얻었다고 했다. 최씨는 “노동개혁을 하고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면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다는데 막상 체감되는 건 없다”며 “정말 일이 간절한 건 나 같은 청년들”이라고 했다.
최씨가 지나쳐온 거리에는 ‘취업 걱정인 청년이 더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청년정책을 제안해주세요’ 등 각 정당의 현수막이 너울거렸다. 가진 건 없어도 투표권은 있는 청년들에게 구애라도 하는 듯했다. 그들의 씁쓸한 자조를 다 품어주겠노라 다독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청년실업률은 9.2%를 찍었다. 1999년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역대 최고치다. 유례없는 취업난에 일찌감치 취직을 포기한 ‘취포자’까지 더하면 누구보다 일이 절실한 청년들은 더 흔하다.
거리로 번진 누리과정 공방
서울 노원구 아파트촌 어귀에선 현수막 전쟁이 한창이었다. 연초 보육대란을 불러온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파행이 서로 네 탓이라는 거다. ‘교육감님, 정부에서 보내준 누리과정 예산 어디에 쓰셨나요’ ‘0∼5세 보육, 국가완전책임은 박근혜 대통령 공약 제2호입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내건 현수막은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불을 놓고 있었다.
네 살배기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때마다 이 광경을 지나치게 된다는 김혜지(33·여)씨는 요즘 누리과정 때문에 속이 탄다고 했다. 김씨는 “결국 서로 잘잘못만 따지다가 이 지경까지 온 것 아니냐”면서 “부모들이 듣고 싶은 건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인데 어느 현수막에서도 그런 문구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임신부 장모(35)씨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누리과정 예산이 집행된다 해도 겨우 몇 달치라는데 이래서야 누가 마음 편히 아이 낳고 기를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응답하라! 박근혜 대통령’ ‘대통령님이 약속하신 누리과정 예산 안 줬다 전해라’ 등 인기 드라마나 유행가의 표현을 빌린 현수막도 등장했다. SNS에 댓글 달 듯 현수막을 내걸기도 한다. ‘정부가 일 좀 하게 해 달라’는 현수막 아래에 ‘국민들 힘들어요. 딴짓 좀 그만 하세요’라는 현수막을 덧대는 식이다.
어떻게든 오가는 눈길을 잡아보려는 시도일 테다. 하지만 시민의 반응은 차가울 때가 많다. 상인 김성우(60)씨는 “경기는 살아날 생각을 안 하는데 선거철이라고, 설날이라고 현수막만 붙이면 뭐 하냐”면서 “가게 간판만 안 가리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선거철을 수놓은 현수막은 선거가 지나면 공약(空約)처럼 사라진다. 덧붙이자면, 현행 옥외광고물 관리법에 따르면 지정된 게시대나 정당 건물이 아닌 곳에 설치된 정당 현수막은 모두 불법이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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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2-15 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