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2월 16일]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입력 2016-02-15 18:02

찬송 :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218장(통 369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4장 9∼15절

말씀 : 가인은 예배에 실패한 후 화가 났습니다. 분노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화를 계속 품고 있다가 동생 아벨을 데리고 나가 죽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결과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아들에게서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살육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병이 들었고, 그 아들 가인은 동생과의 관계에서 끔찍하게 파괴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가인에게 묻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동생 아벨의 행방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의 양심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입니다. 내가 돌아보아야 할 형제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피해를 주거나 괴롭힌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겐 북한의 우리 형제들의 형편을 묻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가인은 뻔뻔스럽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절) 자신이 동생을 죽이고도 회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양심을 찌르는 질문 앞에서도 모른 척합니다. 그런 가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우리 주변에 내가 돌아보아야 할 형제들에 대한 주님의 질문에 대하여 뭐라고 답하고 있습니까. ‘내가 굶게 만든 것이 아니다’ 또는 ‘그것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문제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게 물으실 뿐 아니라 내가 그들을 내 형제로, 내 동생으로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것 챙기는 동안 누군가는 잃어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먹는 동안 누군가는 굶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앞서 가는 동안 누군가는 나를 원망하며 뒤처지기도 합니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함께 손잡아 주지 않았음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내 것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읽어내야 합니다.

주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나의 죄와 그 무거운 짐을 벗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이제 내 몫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관심 갖고 계신 이웃의 아픔을 내가 위로하고 싸매주며 주변의 우리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교회가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북한의 고통과 어둠에 있는 우리 형제에 대하여 우리가 돌보기를 원합니다. 악한 정권에 의해 죽어가는 그들을 우리가 책임지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나의 아우입니다.



기도 : 내 옆에 주신 작고 힘없는 아우 같은 이웃을 돌보며 책임지게 하옵소서. 내 곁에서 울고 있는 작은 자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갖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관선 목사(서울 산정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