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사역 동료이자 분신’ 조선 여성들과 동행

입력 2016-02-15 20:25
로제타 홀은 1899년 조랑말에 약품을 싣고 내륙 지방 방문 진료를 실시했다. 사진은 당시 동행했던 어린 아들 셔우드가 말 위에 앉아 있다. 하희정 박사 제공
1903년 세워진 여성병원. 왼쪽 돌출된 건물이 어린이 병동이다. 이 병원은 1906년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하희정 박사 제공
평양의 첫 여성병원, 잿더미가 되다

로제타는 사랑하는 남편과 어린 딸을 연이어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거부할 수 없는 질문에 봉착했다. 하나님은 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주시는가. 하지만 슬픔을 서둘러 걷어내려 하지는 않았다. 그의 육아일기를 보면 오히려 그 슬픔을 부여안고라도 곁을 떠난 가족들을 마음으로나마 붙잡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슬픔이 밀려올 때마다 로제타는 남편의 소중한 뜻을 이어가기 위해 몸부림치며 아픔 많은 조선 여성들을 치료하는 일에 몰두했다.

하나님은 왜 고통을 주시는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지만 의로운 자의 죽음은 그 두려움조차 넘어설 수 있는 참된 용기를 가져다준다. 로제타는 1898년 6월 광혜여원을 서둘러 개원한데 이어, 조랑말에 의약품을 싣고 내륙지방 순회 치료를 시작했다. 평양에 여성전용병원이 세워진 것만으로도 여성들에겐 더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여성들은 여전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로제타는 신변의 위험을 걱정하는 주변 우려를 물리치고 지방 여행을 강행했다. 진료 한번 받지 못하고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을 방문하면서 로제타는 질병 그 자체보다 병에 대한 무지와 잘못된 미신적 행위가 얼마나 잔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3년 전 남편을 잃은 서른 네 살의 어여쁜 여인에게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20일 동안 굿을 하고 마을 전체가 나서서 폭력을 행사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 둘을 둔 가엾은 여인을 미쳤다는 이유로 짐승처럼 취급하며 돼지우리보다 더한 곳에 가두어 놓고 밤마다 구타했고 머리와 등, 음부를 인두로 지져댔다. 로제타가 도착했을 때 그 여인은 정글에 던져진 가녀린 짐승처럼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겁에 질려 있었다. 온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멀쩡한 사람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안쓰러움에 말문이 막힌 로제타는 이 여인을 하루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하고 싶었다. 좋은 음식을 먹이고 적절한 치료를 해주면 금방 회복될 것 같았다.

하지만 광혜여원에는 정신병을 앓는 여성을 입원시킬 병실이 아직 없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병을 앓는 여성을 병원에 입원시켰다가 자살 시도를 하는 바람에 애를 먹은 적이 있었기에 섣불리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돈이 있다면 병동을 두 개 더 지어 하나는 전염병 환자들을 위해, 또 하나는 정신질환 환자들을 위해 사용하면 좋으련만.” 로제타는 기어코 미국에서 모금을 해와 1903년 어린이병동 옆에 이층 양옥 건물을 올렸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1906년 화재가 나면서 모든 노력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고통을 품고 살았던 여인들

그래도 로제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든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성 동료들이 있었다. 이들도 로제타 못지않은 아픔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사는 여인들이었다. 1900년 가을 귀국한 박에스더는 로제타와 그의 아들 셔우드에게 다시없는 기쁨이었다. 특히 그녀는 조선인 최초로 미국유학을 마치고 의사가 된 입지전적인 여성으로 새로운 역사를 썼다. 하지만 그 대가로 미국에서 두 아기와 남편을 모두 잃는 아픔을 겪었다. 볼티모어에서 식당 일을 하는 등 6년간 아내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한 남편 박유산은 졸업을 앞둔 1900년 4월 28일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끔찍한 외로움과 고된 노동을 견디며 아내를 도왔던 그의 삶은 당시 조선 남자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볼티모어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마 25:35)라는 성경 구절만 남아 그의 외롭고 고단했던 삶을 위로하고 있다.

이화학당 시절부터 박에스더와 함께 했던 노수잔도 로제타 곁을 지켰다. 어린 셔우드는 박에스더와 노수잔을 친이모 이상으로 따랐다. 엄마의 순회 의료에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가도 에스더와 수잔이 해주는 한국 음식을 먹을 욕심에 이들 곁에 남는 선택을 하곤 했다.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도 로제타와 교류하며 평생 의료인의 길을 걸었다. 로제타는 1897년 말 한양으로 돌아와 보구여관에서 잠시 일할 때, 이 소녀들을 처음 만났다. 그레이스의 본명은 복업이었다. 종살이를 하던 15세 소녀였는데 어릴 때부터 다리가 괴사하기 시작해 걷지 못하자 주인이 버렸다. 로제타는 이 소녀를 위해 닥터 커틀러와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괴사한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수술은 성공해 그녀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김마르다는 의처증이 심한 남편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야만적 학대를 받고 버림받은 여성이었다. 보구여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코의 일부를 절단 당한 상태였다. 다행히 커틀러가 외과 치료로 그녀를 회복시켰고 이를 계기로 마르다는 보구여관에서 간호보조사와 전도부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그레이스, 김마르다와 함께 로제타에게 간호학을 배웠던 여메레는 이화학당 시절부터 로제타가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기독교인이 된 한 남성과 결혼했지만, 결혼 직후 미국 유학을 떠난 신랑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혼자가 되고 말았다.

아픔에 대한 공감은 때로 그 어떤 끈보다 강한 결속과 연대를 만들어낸다. 이 여성들이 겪었던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은 일상의 억압과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동시대 여성들의 고통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로제타는 진심으로 다가갔고 그의 치료는 스스로 아픔을 딛고 새롭게 설 수 있는 좋은 약이 되었다.

훗날 여메레는 서울과 평양에 왕실이 후원하는 진명여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을 보탰다.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는 1903년 닥터 마거릿 에드먼즈가 보구여관 부설로 세운 간호원양성학교에서 공부한 후 첫 정식 간호사가 되어 조선 여성들을 치료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다.

하희정 박사 <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