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버린 쓸모없는 고물(古物)이 전철(68·분당신성교회) 안수집사에겐 보물(寶物)이다. 전 집사는 조간신문 배달원, 고물 수집상, 계약직 회사원 그리고 주말과 공휴일 등 틈날 때마다 잡역부일을 하는 4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매일 새벽 1시에 일어나 오후 7시에 귀가하는 일을 10여년째 반복하고 있다. 하루 18시간을 정신없이 일하고 4시간을 자는 고행의 연속이다. 설 연휴 끝자락인 지난 10일 오후 서울 지하철 1호선 대방역에서 그를 만났다. 군청색 점퍼와 청바지에 갈색 중절모를 쓴 전 집사에게서 고물 장수가 아니라 칠순을 바라보는 노신사의 포스가 느껴졌다.
별 볼 일 없는 인간임을 깨달아
경기도 오포읍 능평리에서 계약직 창고지기로 일하는 전 집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자랑했다. 그야말로 쉼 없는 생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땀 흘려 번 돈의 달콤함 속에서 노동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매일 새벽 1시30분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니며 10여종의 신문 200부를 3시간30분 동안 배달한다. 신문배달을 마치면 40분간 새벽기도를 드린다. 예배 후 창고지기로 일하는 곳까지 가는 동안 네댓 군데의 쓰레기장을 뒤져 얻은 고물을 1t 트럭에 가득 채운다.
그는 제5공화국 시절에 잘나가던 경찰이었다고 했다. 대구에서 경찰공무원으로 파출소 경감까지 지냈던 그는 22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생활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개설해 ‘불우근로 청소년의 대부’로 불렸다. 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청와대로 초청돼 대통령과 오찬을 하는 소위 잘나가는 경감이었다.
중학교 영어교사였던 한 살 아래인 아내 우은숙 권사를 만나 정원이 있는 집에서 두 아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젊은 날 그는 무슨 일이든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예퇴직을 하고 뜻한 바가 있어 목조건축회사를 차렸다. 의욕과 욕심이 앞선 탓일까. 1997년 외환위기가 시작될 무렵 사업은 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행복했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돈 빌리러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그럭저럭 버텼지만 탈출구가 없었다. 전 집사는 선산까지 은행 빚 경매로 다 날리고, 이 와중에 부친마저 잃고 말았다.
2003년 6월 30일 전 집사는 대구에서 도망치다시피 서울로 올라왔다. 아주대 건축과에 다니던 큰아들 덕호(37·허첵·인디밴드 슈퍼키드 보컬)씨는 입대했고 아내와 둘째 아들 두호(36·변호사)씨는 서울 신림9동 고시촌 원룸으로 들어갔다. 모친과 어릴 때 입양된 여동생 연숙(51)씨는 친척집 더부살이 신세가 됐다.
홀로 된 전 집사는 서울 영등포 쪽방에서 노숙생활을 하면서 그야말로 하루살이처럼 동가식서가숙하면서 뜻 없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오늘 죽느냐-내일 죽느냐’ 이것이 문제였다. 6개월 정도 무위도식하는 동안 자신이야말로 참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고 깨달았다. 잘난 맛에 살았던 지난날이 후회막급이었다.
2004년 12월 전 집사는 죽을 수조차 없었던 비겁함이 엄습했을 때, 몰염치라는 가면을 쓰고 오기의 밧줄을 잡았다. 사실 전 집사는 모태신앙이었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도 체험한 적도 없었다고 했다. “그래, 하나님이 계신다면 살려 달라고 오기를 부려보자.”
그러던 어느 날 전 집사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니면 세상 사람들이 ‘폐인 전철’을 새롭게 봐주지 않을까.”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다를 바 없었다. 외식에 빠진 전 집사는 또 다른 오기가 생겨나서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인테리어회사 창고지기를 하면서 출근시간까지 고물 수집에 나섰다. 얼마 후부터는 신문배달까지 하며 돈을 버는 족족 빚을 갚았다. 생활비는 텔레마케터 등을 하는 아내가 책임져야 했고 전 집사는 빚 갚는 일에 급급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날 즈음 오기가 발동했다. 빚쟁이는 물론 주위 사람들로부터 당한 냉대와 수모 등 온갖 치욕을 언젠가는 갚겠다는 복수심으로 칼을 갈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이 버팀목이 됐다.
새벽은 내 영혼의 에너지 넣어주는 주유소
2013년 10월 11일 마침내 신용회복위원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10여년간 성실히 부채 상환 의무를 다한 결과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개인 빚이 여전히 30% 정도 남았지만 전 집사는 날아갈 만큼 기뻤다.
한숨을 돌리는 순간 전 집사는 무릎을 치며 일어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못난 죄인을 용서해주세요. 고물덩이나 다름없는 저를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사랑해주시다니요.”
그 순간, 전 집사는 가슴에서 사랑과 용서의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모든 것을 잃고 두 번째 얻은 깨달음이었다. 이후 전 집사의 일상은 참으로 평강 속에서 고된 일도 즐거움으로 변했고 보기 싫은 사람, 미운 사람과 원수라고 생각했던 자의 복수심도 다 사라졌다고 했다.
전 집사는 5년 전에 3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해답을 얻은 것이었다. 먼저 매일 노트에 새벽기도 횟수를 기도 내용과 함께 표기하던 것을 멈추었다. 남들에게 새벽기도 몇 천일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고 자랑한 것이 한없이 부끄럽고 창피했던 것이다.
“이젠 횟수와 관계없이 죽을 때까지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새벽기도가 내게 준 그 어마어마한 힘을 체험했기 때문이죠. 은혜를 원수로 갚기가 얼마나 나쁜 짓이 되는지도 알았고 목적이 순수해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전 집사는 13년 전 대구에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상경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얘기를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그는 서울에 와 10여년이 지난 2013년, 남의 티보다 자신의 허물이 더 커 보였다고 했다. 노트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 일수를 기록하며 훈장처럼 자랑한 것이 너무나 창피해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새벽기도는 매일매일 내 잘못이 무엇인지 자신의 부족함은 어떤 것인지를 묵상하는 시간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일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신성교회 문명준 목사님을 비롯해 작은 교회로 가라며 등록조차 못하게 한 이찬수 분당우리교회 목사님과 그동안 저를 단련시켜준 교회 덕분이지요. 새벽기도는 내 영혼에 에너지를 넣어주는 최고의 주유소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신년 초 새로운 계획과 도전 앞에선 많은 이들에게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헌옷 보따리가 많이 있으니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고 오포로 돌아가기 전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꿈을 얘기했다. 오십 평생을 ‘오빠 바보’로 살아온 동생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지체장애인들을 돌보며 행복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복지법인을 설립하는 것이다. 전 집사는 이를 위해 4700여일째 새벽기도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가 악수하려고 내민 손가락 마디마디에 두툼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글·사진=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얼굴] 4700일, 오기로 다닌 새벽기도… 어느날 문득, 부끄러웠다
입력 2016-02-12 2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