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 직장인 박모(31)씨는 이맘때면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야근 풍경이 기말고사를 앞둔 도서관 같아서만은 아니다. 설 연휴 직전 통보받은 지난해 인사고과 평가서에 알파벳 대문자 ‘C’가 선명했다. 박씨는 “저녁도, 가족도, 애인도 없이 일에 치여 살았는데 결국 남은 건 이 성적표 한 장이더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달 25일 저성과자를 해고할 수 있게 한 일반해고 지침 등 ‘양대 지침’을 시행했다. 지난달 28일에는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권고안을 확정했다. 이어 금융위원회는 금융공공기관에 성과연봉제를 도입한다고 지난 1일 밝혔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2016년을 ‘성과’란 단어와 함께 시작했다. 일상의 대부분인 직장생활을 좌우할 용어이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직장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짬밥’보다 실력이 우선돼야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이 높아진다는데, 일하지 않는 사람이 연공서열로 고임금을 받는 건 불공평하다는데 딱히 할 말은 없다. 직장에서 ‘무임승차자’ 한두 명은 다들 겪어본 터라 내심 반기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반면에 ‘지금도 치열한 사내 경쟁이 더욱 심해질 텐데…’ ‘결국 실적 압박이 장난 아니게 세질 텐데…’ 하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전에는 깊이 따져보지 않았던 생각도 고개를 든다. ‘그럼, 우리 회사 인사고과는 공정한가?’
결국 실적 높이란 얘길 텐데
은행원 조모(32·여)씨에게 ‘성과’는 ‘실적’과 이음동의어다. 성과를 높이자는 지점장의 구호가 실적을 더 올리라는 잔소리로 들린다고 한다. 그는 “밥 먹듯이 야근해서 겨우 할당량을 맞추는데 성과연봉제가 도입되면 실적 압박이 심해질 게 뻔하다”며 “성과연봉제를 해도 연봉 격차만 커지고 총액은 같을 거라서 결국 업무량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금융공공기관에 성과연봉제가 도입되면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권 전반에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시중은행 대부분은 연공서열식 호봉제를 실시하면서 지점별 성과를 측정해 성과급만 차등 지급하고 있다.
지점별 성과에 따라 같은 연차라도 수천만원씩 성과급 차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개인별 실적으로 성과를 측정하게 되면 그 차이는 더 커질 전망이다. 월급봉투의 차이만큼 동료 간 경쟁이 심해지고 업무 강도가 높아질 거란 볼멘소리가 새어나온다.
‘해고’의 두려움은 이런 성과 스트레스를 더욱 심하게 만든다. 같은 은행에 근무하는 박모(37)씨는 “성과에 따른 연봉 격차는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도 “한번 저성과자로 낙인찍히면 언젠가는 해고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어도 선뜻 퇴근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임승차 생각하면 맞는 방향이지만
중견기업 재무팀 대리 김모(29·여)씨는 야근하러 혼자 남은 사무실을 볼 때면 한숨만 나온다고 했다. 그럴 때면 우연히 본 팀장의 월급명세서가 떠오르곤 한다. 점심시간 지나면 팀장의 의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가 많은데 월급은 팀장이 두 배 가까이 많다.
김씨가 근무하는 회사에선 성과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호봉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하는 신입사원이나 접대·외근으로 자리를 비우기 일쑤인 부장도 연차에 따라 엇비슷한 월급을 받는다.
김씨는 “혼자 일을 다 하는 것 같은 날이면 무임승차자 해고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면서도 “저성과자 해고나 성과연봉제 확대를 선뜻 반기진 못하겠다”고 말했다. 저성과자가 설사 해고되더라도 새로운 인력이 충원되기보다 기존 인력이 업무를 나눠가질 게 뻔하다는 생각에서다. 성과 평가가 제대로 된 성과를 반영하지 못할 거란 의문도 크다.
우리 회사 고과는 공정한가
대기업 과장 조모(36)씨는 “요즘 같은 인사고과 철이면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상사에게 인사말을 건넬 때도 행여 알랑거리는 걸로 받아들이진 않을까 걱정이 든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부하직원을 평가할 때 드러난다. 조씨는 “주어진 업무도 챙길 겨를이 없는데 부하직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일일이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지난달 인사고과에서 부하직원들 모두에게 엇비슷한 점수를 줬다.
중소기업 사무직 임모(29)씨는 지난주 낙제점에 가까운 인사고과 점수를 받았다. 부당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친한 동료에게 하소연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임씨는 “사무직은 생산직만큼 성과평가 기준이 뚜렷하지 않다. 평가자인 부장 한 명이 잘 따르는 부하직원에게 높은 점수를 줘도 사실상 견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연봉이나 성과급을 산정하려면 성과평가가 필수다. 대개는 주먹구구식이다. 상사 한 명이 평가의 전권을 갖거나 한 해의 성과가 평가자와의 친소관계로 결정되기도 한다. 제대로 된 평가기준 없이 연공서열에 따라 등급을 나누거나 책임을 피하려고 모두에게 같은 점수를 매기는 경우도 흔하다. 무엇보다 조직이 목표로 하는 성과가 무엇인지 개념정리조차 안 돼 있는 직장도 많다.
임씨는 “생산성을 중시하는 성과주의 때문에 상사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는 비생산적 ‘업무’만 늘었다는 우스개를 동료들과 나누곤 한다”고 말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지금도 경쟁 치열한데 ‘성과’가 더 필요하다고요?… 저성과자 해고·성과연봉제 확대
입력 2016-02-12 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