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代 성폭행 후 합의한 사건, 형량 물어 봤더니… 일반인 36% ‘실형 선고’ 법조인은 8%

입력 2016-02-12 04:06
미용사 A씨(25)는 2012년 7월 미용실 인턴직원 B씨(17·여)와 그녀의 자취방에서 술을 마셨다. A씨는 키스 등 신체접촉을 했다. 새벽 2시쯤 B씨가 술에 취해 잠들자 억지로 옷을 벗겼고, 반항하는 B씨의 팔을 붙잡고 강간했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범행을 자백했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 A씨에게 실형과 집행유예 중 어떤 형벌을 내리는 게 적절할까.

형사정책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형사정책과 사법제도에 관한 평가 연구’에서 일반인 1000명과 판사 등 법조인 52명의 양형 판단을 비교 분석했다. 그랬더니 A씨가 피해자와 합의했어도 일반인 35.9%는 실형을 선택했다. 반면 법조인들은 8%만 실형 결정을 내렸다.

일반인과 법조인의 ‘법 감정’ 사이 틈이 넓다. 2009년 7월 대법원은 국민의 상식을 반영하겠다며 양형기준제도를 실시했지만 현실과의 괴리는 여전하다.

일반인은 ‘중형’ 선택 경향 높아

A씨를 얼마나 감옥에 살게 할지를 두고도 판단이 갈렸다. 실형을 선고한 법조인 중 75%가 2년6개월∼4년형을 택했다. 일반인은 38.4%만 같은 형을 선택했다. 4∼7년(25%), 7년 이상(32%) 중형이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일반인과 법조인이 양형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합의 여부다. A씨가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한 경우 법조인 98%가 실형을 선고했다. 반면 일반인은 70.4%만 실형을 선택했다.

형량은 일반인이 여전히 세다. 법조인 58.8%가 2년6개월∼4년형을 택한 데 비해 일반인은 4∼7년(33.1%), 7년 이상(34.7%)이 적정하다고 응답했다.

8세 여자아이의 볼에 억지로 뽀뽀를 하는 등 강제추행을 저지른 경비원 C씨(70)의 사례도 비슷했다. 피해자와 합의한 경우 일반인 15.9%가 실형을, 법조인은 4%만 실형을 선택했다. 실형을 택한 법조인들은 모두 7년 미만 형이 적절하다고 봤다. 일반인은 절반 이상(50.3%)이 7년 이상 형을 지목했다.

강간 형량 늘고, 배임 형량 줄고

양형기준제도 실시 이후 실제 판결 경향은 어떨까. 형사정책연구원은 양형기준제도 시행 이전인 2003∼2004년, 시행 이후인 2013∼2014년도 양형을 비교 분석했다. 서울중앙지검 등 8개 검찰청에서 기소한 사건 가운데 성범죄(747건), 강도범죄(345건), 횡령·배임죄(786건) 1심 판결을 대상으로 했다.

분석 결과, 강간 등 성범죄의 징역형 형량은 실시 이전 평균 27.6개월에서 32.5개월로 약 5개월 늘었다. 여성법관이 포함된 재판부의 성범죄 형량이 높다는 통념은 양형기준제도 실시 이후엔 들어맞지 않았다. 제도 시행 전 여성법관이 포함된 재판부는 남성법관으로 구성된 재판부보다 형량이 5개월 정도 높았지만 실시 이후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강도범죄 역시 제도 실시 이후 형량이 29.2개월에서 32.3개월로 약 3개월 늘었다. 횡령·배임죄는 되레 형량이 2개월 정도 줄었다.

82.6% “권력자들은 처벌받지 않아”

국민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연구원이 일반인 1000명에게 설문했더니 “양형기준제도를 잘 안다”는 응답은 10%에 그쳤다. 법집행이 공정하다는 인식도 대체로 낮았다. “권력자들은 법을 위반해도 처벌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의견에 82.6%나 동의했다. 학력이 높을수록, 화이트칼라일수록 공정성을 보다 더 낮게 생각했다.

연구원 측은 “국민으로부터 지지받는 양형기준을 운영하기 위해선 형사사법 기관의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며 “거꾸로 양형기준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 판사의 자의적 결정이라는 논란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