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 ‘심리적 을’은 있기 마련이다. 대개 갑을관계는 거래처를 포함해 권력의 상하가 분명할 때 생기는 개념이다. 그러나 외견상 평등한 부부사이에서도, 숙박지의 주인과 손님 관계에서도, 돌싱 남녀 사이에서도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갑을관계는 형성될 수 있다. 늘 그 앞에 서면 작아지고 주눅 드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근저에는 경제력 차이, 외모의 우열, 학벌의 차이 등 사회적 잣대에 따른 위계가 가로 놓여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걸 민감하거나 콤플렉스 탓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한다.
최정화(사진)의 첫 소설집에선 ‘심리적 을’들의 치졸한 복수극이 펼쳐진다. 옹졸해서 상대방은 눈치를 채지 못하거나 찻잔 속 태풍에 그치는 수가 많다. 때로는 스스로를 불행 쪽으로 더 옥죈다.
‘틀니’의 아내는 병원에서 직업 간병인으로 오해받을 만큼 외모가 처지는 전업주부다. 훤칠하고 직장에서도 잘 나가는 남편은 40대 초반에 사고로 틀니를 하게 됐다. 남편은 ‘부부 사이니 어떠냐’는 아내의 말에 어느 날부터 면전에서 틀니를 뺀다. 합죽해진 입을 보는 순간, 아내는 둘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는 듯한 묘한 희열을 느낀다. 더 이상 남편을 존경하지 않게 됐다. 꼬인 심사가 절정을 이룬 건 손님을 초대했을 때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남편이 현관으로 간다. 이 때 화장대에서 남편의 틀니를 발견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를 알려주지 않는다. 스타일을 구기게 된 남편은 어찌됐을까.
표제작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시골에서 민박을 치던 돌싱녀 미옥의 집에서 미옥과 여름철을 머물던 여성 소설가와의 관계를 그린다. 자신의 평에 일희일비하는 ‘선생님’의 반응에 우쭐해진 그녀는 급기야 장난기가 발동한다. “이번 얘기(소설)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관계는 서먹해졌고, 글이 완성된 소설가는 서울로 떠난다. 책이 출간되고 첫 장에서 ‘지난여름을 내내 함께한 너에게’라는 글귀를 발견한 미옥은 묘하게 떨린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의 낭패감이라니. 집착과 피해의식 때문에 미옥이 독자와의 사인회에서 지칼(편지봉투 등을 뜯는 칼)을 손에 쥐려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후 상황이야 뻔하지 않을까.
단편 10편이 수록된 소설집에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다양한 인물들의 내면심리가 펼쳐진다. 가족 바캉스에서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가장이 느끼는 무력감을 밀도 있게 그린 ‘팜비치’, 재력이 더 있는 돌싱녀와 결혼하기 위해 굽실거리는 남자의 뒤틀린 심보를 다룬 ‘대머리’,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가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도우미에 대한 질투로 표출된 ‘구두’ 등이 그렇다.
‘심리적 을’의 불안과 저항은 소설에서처럼 세상이 느낄 만한 의미 있는 진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걸 포착해내는 작가의 예민한 촉수가 위로를 준다. 살다보면 누구라도 을로 느껴진 순간들이 적지 않아서일 것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길-지극히 내성적인] 소심한, 그래서 위태로운…
입력 2016-02-11 2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