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대목 대전 한민시장 채소가게 알바 3일]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전통시장엔 믿음이 있었네

입력 2016-02-11 04:03
국민일보 김판 기자(왼쪽)가 설 전날인 7일 대전 서구 한민시장 채소가게에서 손님에게 가지를 담아주고 있다. 가게 주인 장응순씨가 촬영했다.

설을 맞아 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상인들에게 명절은 대목이다. 경기가 나빠도 가족을 위한 음식에 신선한 재료를 쓰려는 이들로 시장은 붐볐다. 대전 한민시장의 채소가게에서 설 준비로 분주한 이들을 만났다. 이곳에서 30년 넘게 채소를 팔아온 김양군(63) 장응순(59·여) 부부의 가게에서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사흘간 일을 도우며 전통시장의 설 준비를 지켜봤다.

‘아들 이름’이 적힌 채소 상자

5일 오전 4시 김씨 부부와 함께 1t 트럭을 타고 대전 대덕구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은 이미 물건을 실으러 온 트럭들로 가득했다. 오토바이와 전동 지게차가 농산물 상자를 분주히 트럭에 옮겨 담았다.

소매상과 도매상 사이에도 ‘단골’이 있다. 품목별로 주로 거래하는 도매상이 정해져 있고, 이 관계는 그 소매점의 ‘정체성’을 지켜준다. 김씨가 고구마와 당근을 파는 도매상에게 “이봐, 당근 특 좀 있어?”라고 묻자, “특자로? 왕특으로?” 하는 되물음이 왔다. 채소 상자에는 품질에 따라 특·상·중·하로 등급이 표시된다. ‘당근 특’은 최고 등급의 당근이 있느냐는 뜻이었다.

김씨의 주문에 도매상이 마련한 당근 상자에는 ‘광태’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 소매상에게 보낼 물건인지 표시해둔 암호 같은 것인데, 광태는 김씨의 큰아들 이름이다. 30년간 시장 사람들은 광태가 커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본 터였다. 가게 상호보다 ‘광태네’란 말로 더 쉽게 통한다. 김씨는 “좋은 물건을 제 값에 파는 거지. 이 당근은 다 내 아들 같은 녀석들이야” 하며 아들 이름이 적힌 당근 상자에서 싱싱한 당근을 들어보였다.

다음날 오후 한 손님이 “어제 산 마늘인데 혹시 환불이 되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환불해주겠다고 마늘을 건네받는 순간 장씨가 “그거 우리 마늘 아니에요”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마늘 알의 크기가 달랐다. 매일 채소를 들여다보는 장씨는 “딱 보면 어느 집 자식인지 다 알지. 우리 집 마늘은 알이 더 작고 단단해”라고 말했다.

시장의 소리들

명절에는 채소값이 오른다. 이번 설에는 대파 쪽파 양파가 특히 비쌌다. 지난 설에 한 단에 6000원이던 대파가 이번에는 9000원이었다. 한 단에 5000원 하던 쪽파도 7000원까지 올라갔다. 양파 6개가 들은 작은 망도 2000원에서 3000원으로 뛰었다.

이렇게 비싼 가격이 형성되면 상인들은 불편해한다. 장씨는 비싼 값이 미안했는지 대파를 찾는 손님들에게 너스레를 먼저 떨었다. 한 손님이 대파 가격을 묻자 그는 “아휴, 어떡한데. 비싸서 못 팔겠어” 했다. “그래서 얼만데요?” 재차 물으니 그제야 “한 단에 9000원. 너무 비싸니깐 3000원어치만 사가세요”라고 말했다.

손님은 크게 두 분류였다. 이 가게를 찾아오는 단골손님과 지나가다 찾는 물건이 보여 다가온 손님.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면 50여종 채소가 5평 남짓한 공간에 모두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싱싱한 자태를 뽐내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버섯은 머리 부분이 깨지지 않고 곧은 뿌리가 잘 보이게 담아야 했다. 손님의 눈길을 붙드는 데 성공하면 그가 유심히 바라본 채소에 관해 얘기를 꺼내며 먼저 말을 걸었다.

틈틈이 창고에서 부족한 물건을 싣고 오기도 했다. 가게에서 창고까지 거리는 왕복 100m가 채 안되지만 폭 3m 정도의 시장 골목에서 물건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끌기는 쉽지 않았다. “비켜유, 지나가유” 외치며 양해를 구하자 손님들도 조금씩 비켜서서 길을 내줬다.

전통시장, ‘믿음’을 판다

사흘간 일을 도왔지만 단골손님들은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기자에게 물건을 사지 않으려 했다. 조금 더 기다리더라도 주인과 직접 인사를 나뉜 뒤 구매했다. 그동안 ‘믿음’이 쌓였기 때문이다. 주인은 단골손님에게 같은 값에도 양을 더 많이 주거나 사고팔기 애매한 생강 한두 개를 서비스로 줬다. 나물 조리법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사흘째가 되니 너스레를 떠는 데 조금 익숙해졌다. 미나리를 유심히 지켜보는 손님에게는 “아이고, 미나리 너무 예쁜데 비싸서 어떡하지”라고 말을 건넸다. 버섯을 사려는 손님이 보이기에 “뭐에 쓰시려고요? 꼬지 하려면 이놈으로 하시고 잡채면 저놈으로 하세요”라며 추천을 하기도 했다.

이 가게 단골인 이모(46·여)씨는 “이 언니한테 사야 믿고 살 수 있지. 우리 언니가 거짓말 하겠어? 비싸도 광태네 채소는 먹어보면 또 오게 돼 있어”라고 말했다. 장씨는 “손님, 우리는 좋은 것만 팔아유. 알잖유”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을 앞두고 사흘간 1200여명이 이 가게를 다녀갔다. 장씨는 “대형마트 때문에 예전보다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통시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가게 주인도 손님도 다 같은 주부였다. 장씨가 허리를 숙인 채 숙주를 다듬고 있으면 단골손님들이 그의 허리를 두드려주며 “언니, 허리 아프겠다. 음식은 또 언제한대?”라고 말을 건넸다. 그럼 장씨는 “우리도 얼른 다 팔고 들어가 음식해야지” 하며 웃었다. 설에 찾은 시장에는 대형마트에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전=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