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칼럼] 불안한 미래, 내일을 읽는 통찰력

입력 2016-02-05 17:06

미래는 누구에게나 낯설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언제나 호기심의 대상이다. 미래는 기대이면서 불안이기도 하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불안을 동반한 기회의 시간이다. 기회와 불안은 동지이면서 까다로운 동반자다. 내일이 불안하면 미래를 예측하는 분석가들이 늘어난다. 전문가들의 예측은 설득력이 있다.

각종 통계와 데이터로 무장된 분석자료를 들여다 보면 그 논리와 증거들에 솔깃해진다. 솔깃하지만 의심은 공존한다. 그래도 미래가 불안한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붙들고 싶어한다. 이들에게 호황과 불경기에 대한 전망 보다 절실하고 현실적인 것은 없다. 세상의 전망과 예측들은 주로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다가올 어려움을 예상하고 잘 대비하라는 흔한 정보들이거나 굳이 알아도 별 도움이 안 되는 내용들인 경우가 많다.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불안은 깊어진다. 불안이 클수록 사람들은 미래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현실이 불안하면 미래에 대해 막연한 희망을 갖게 된다. 거짓말이라도 희망을 말해주는 곳에 사람들은 의지하려고 몰려든다. 세상이 힘들어질수록 사이비 류의 떠도는 각종 설들은 자꾸 많아져 간다. 헛된 희망을 부채질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거기에 위험한 배팅을 하는 피해자들이 속출한다. 바쁘고 피곤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지고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적 혼란이 야기되기도 한다.

우리는 공연한 미래예측으로 허튼 희망을 유포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미래는 알 수 없다. 인간은 예측할 뿐, 내일이라는 시간은 비밀커튼 뒤에 숨어있다. 예측은 맞을 수도, 빗나갈 수도 있다. 예측은 예언과 다르다. 아무리 기가 막힌 예측을 내놓는다 해도 세상은 변수로 가득하다. 현대의 변화 속도는 매우 가파르다. 역사의 격변기에 살고 있다. 시간의 증폭이 불규칙하고 난해하다. 전문가라도 미래를 짐작하기 어렵다. 미래를 예측하기도 전에 현상은 미리 앞질러 나가고 있다.

시간의 변곡점 상에서 필요한 것은 예측보다는 현재를 제대로 들여다 볼 줄 아는 혜안이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내 손 밖에서 움직이고 있다. 손 안에 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뿐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4) 내일을 당겨 오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미래를 예측하고 전망할수록 신기하게도 염려는 더욱 늘어난다. 미래에 대한 너무 많은 관심 때문에 현실에 대한 왜곡증세가 심화된다.

요즘 현실부적응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을 가공하고, 현실을 왜곡하면 미래는 공중 분해될 수 있다. 내일에 대해 미리 아는 것은 도움보다는 손실이 더 크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하루의 시간에 대한 경외심으로 삶을 불태워야 한다.

충실한 하루, 꽉 찬 오늘의 시간이 내일을 예측하게 만든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어제와 똑 같은 삶을 살면서 다른 삶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 미래의 시간을 임의로 바꿀 수는 없지만 오늘은 바꿀 수 있다. 내일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혁명은 오늘의 일이다. 대부분의 불안은 내일 때문이 아니라 오늘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미래가 불안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간 속에서 만족할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불안의 요인이다.

오늘이 불안하면 내일은 더 불안해진다. 내일은 요행으로 맞이할 수 없다. 미래보다 현실을 읽는 능력이 미래를 여는 통찰력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날을 세우기보다 현실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는 봄날의 새싹이 치열하게 겨울의 시간을 살아내고 나온 것처럼, 미래보다 현실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 된다.

이규현<부산 수영로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