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우리 가족은 황해도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에서 일곱 번이나 이사를 하며 셋방살이를 했다. 65년 원주 원동 쓰레기매립지 위에 세워진 31㎡(9.5평) 국민주택에 정착하고서야 비로소 기나긴 셋방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해 여름 어느 날 우리 집 문 앞에서 서성이는 할머니 한 분을 보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할머니였다. “할머니 누구네 집을 찾으세요?” 그러나 할머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집을 나왔는데 길을 잃게 되었고, 며칠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주었으면 한다”고 대답하셨다. 마침 점심때라 식사하러 오던 큰형이 이 말을 듣고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오신 할머니는 “그저 마당에서 냉수 한 그릇에 밥 한술만 주면 먹고 가겠노라”고 하셨다. 하지만 1·4후퇴 피란길에 친할머니와 생이별한 형님, 시어머니를 잃고 찾지 못해 애타하던 어머니는 그 할머니를 소박한 식탁에 모셨다.
한사코 사양하던 할머니는 정신없이 드시고는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그리고 1년 반도 더 지난 어느 날, 그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봉지에 참외 몇 개를 사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길 잃었던 그날 정성껏 차린 밥상과 배고픔을 잊게 해준 고마움이 잊을 수 없어 아들과 함께 다시 찾아오신 것이다. 그날 할머니께서 가져온 참외는 내 인생에서 유난히 달았다.
이후 나는 감리교신학대학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1998 수원종로교회에 부임했다. 부임 다음 날, 예배 직후 점심식사 시간. 한 여선생이 자기직업은 사회복지사이고 기관에서 일하는데 요즘은 점심을 거르는 독거노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에는 모 대기업의 식당에서 주는 반찬을 독거노인과 나누었는데 IMF 경제위기로 그것이 끊겼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갑자기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분단된 나라, 원치 않는 헤어짐으로 깨어진 가정과 가족에 대한 아픔이 떠올라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이 일을 통해 교회가 독거노인 등을 감당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나는 교회 사회봉사부, 연합여선교회와 협의하여 매주 토요일 가난한 이들에게 반찬을 배달하는 것을 제안했다. 지금은 반찬 배달과 매주 토요일 점심식사 대접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교회가 매월 첫 주 성찬식에 드린 성찬헌금은 이들을 돕는 데 긴요하게 쓰인다.
이 사역을 시작한 지 18년이 됐다. 우리 교회는 이분들을 ‘나사로 가족’이라 부른다. 지금껏 나사로 가족을 모시는 데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이 여러모로 채워주셨다. 무명의 이웃이 보내온 후원금, 청과시장 상인이 주신 야채, 이웃 사찰에서 보내준 된장, 교인들이 따로 보내주는 쌀과 부식 등이다. 쌀은 돈 주고 사지 않고도 18년간 쌀독이 바닥 난 적 없다는 게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공감과 나눔을 오병이어라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교회 식당을 찾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놓은 끼니는 8만8689인분. 봉사한 교인은 연인원 2만7683명이다. 총 836회차를 넘기고 있다. 나사로 가족과 함께 식탁을 대하면서 부르는 찬송이 있다.
“갈릴리 해변서 떡을 떼사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주, 생명의 양식을 나에게도 풍족히 나누어주옵소서. 말씀에 감추인 참진리를 깨달아 알도록 하옵소서. 아멘.”
안희선 수원종로교회 목사
◇약력=△감리교신학대 졸업 △고려대 교육대학원 졸업 △스크랜턴기념사업회 이사장 △수원종로감리교회 담임
[따뜻한 밥 한 끼-안희선] 내 인생의 참외 한 개
입력 2016-02-04 2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