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교육의 설계도'인 국가교육과정이 지난해 9월 바뀌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은 내년 1학기에 초등학교 1, 2학년을 시작으로 2018년에 초·중·고교에서 본격 적용된다. 새 교육과정은 문과와 이과의 벽을 허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과목별로 파편화된 지식을 주입하고 5지 선다형으로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이뤄진다. 대표적으로 국어와 수학 과목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한 달간 남녀가 아무 일도 않고 탐한다는 게 가능해?” “첫사랑의 순수한 열정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물학적인 성 말고 사회관계 문제도 있겠지.” “사람이 굉장히 그리웠다는 걸 상징하는 표현일 거야.”
단편소설 한 권을 함께 읽었을 뿐인데 가족과 인간관계, 결혼관, 사랑, 섹스 등으로 토론이 꼬리를 물었다. 소설 속 연애스토리 부분에선 10대들의 대화가 더욱 불꽃을 뿜었다.
“첫눈에 반해 결혼이 가능해?” “첫인상이 연애로 이어져 결혼할 수도 있지.” “사랑 없는 결혼은? 예쁜 여자와 돈 많은 남자 같은.” “예쁜 여성에 대한 편견이야. 본모습에 반할 수도 있어.”
아이들은 토론을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듯했다. 이윤희(19)양은 “짧은 소설에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토론을 하다보니 내 안에만 맴돌던 가족과 친구, 연애에 대한 생각이 확장되는 묘한 경험을 했다.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느낌”이라고 했다.
5지 선다형 아닌 ‘진짜 국어 수업’
올해 대학생이 되는 이양은 고2 때 이런 경험을 했다. 경기도 남양주 광동고 송승훈 교사의 국어 수업에서였다. 송 교사는 5, 6명으로 조를 짜 책을 읽힌다. 한 학기에 1권이다. 1학기는 책을 읽고 2학기에는 작가 등과 인터뷰를 추진한다. 토론을 거쳐 보고서를 쓴다. 수업과정 전반이 평가 대상이고, 내신 비중이 높다.
지난달 28일 송 교사의 수업에 참여했던 이양 등을 만났다. 송 교사는 아이들의 2년 전 보고서들을 가득 들고 나왔다.
이양의 조가 읽은 책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였다. 사회는 물론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는 ‘하류 인생’ 용대와 ‘시한부 인생’ 조선족 명화가 주인공이다. 보고서에는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왕따 문화’와 가족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었다. 용대가 명화의 죽음 뒤에 명화의 사랑을 깨닫는 대목에선 진정한 사랑을 고민한 흔적이 있었다.
아픈 명화를 위해 용대가 돈을 빌리려 다니는 장면에선 인간관계와 신용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돈과 행복의 관계’라는 철학적 주제로 뻗어갔다. 토론은 묵직했지만 결론은 발랄했다. “소중한 사람에게, 있을 때 잘하자”로 마무리했다. 이양은 “다른 친구들은 우리가 싸우는 줄 알았다. 그만큼 몰입했던 시간이다. 대학 가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웃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와 같은 무거운 주제의 책을 다룬 조도 있었다. 방현석 작가가 김근태 전 의원의 생애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아이들은 김근태와 전태일, 민주화 투쟁과 고문 등 어두운 역사만 보지 않았다. 김근태를 키워낸 엄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기도 하고, 스스로 부모가 됐을 때를 그려보기도 했다.
‘질레트 면도날 사건’은 화제였다. 김근태의 아버지가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면도날 한 갑이 없어지자 범인으로 김근태를 지목하고 인두로 위협을 가했던 일화다. 면도날이 주머니 안쪽에서 발견됐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김근태가 달걀 훔친 전력이 있었지만 과했다.” “그래도 거짓말을 바로잡고 싶었던 것이다.” “가부장적 사고 때문이다.” “아버지도 인간이고 부끄러웠다. 사과했다면 좋았을 걸.”
‘2015 개정 교육과정’으로 교실에서 ‘독서 토론’
송 교사의 수업에 참여했던 김성진(19)군은 시를 좋아한다. 잠들기 전에 꼭 시집을 읽는다. 하지만 국어수업은 고통이었다. 학교에선 문학 작품의 중심내용 등을 파악하고 답을 고르도록 한다. 문학도 예술이므로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게 김군의 믿음이다. 김군은 “내가 생각하는 답과 학교에서 요구하는 답 사이에서 갈등했었다. 내 생각을 써 점수가 깎인 적도 많다”고 했다. 김군이 송 교사의 독서수업에 매료된 이유다.
국어 교사들도 김군의 문제 제기를 타당하고 여기지만 5지 선다형 문제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가르치기 편리하고 성적에 대한 이의제기 같은 귀찮은 일이 없어서다.
이런 모순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2018년부터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송 교사 같은 수업 방식을 전국 초·중·고교 교실로 확대한다. 5지 선다형 수업이 아닌 ‘진짜 독서수업’을 권장하는 것이다. 한 학기에 책 한 권을 읽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면서 듣기·말하기·읽기·쓰기를 한꺼번에 익히게 한다는 구상이다. 풍부한 독서 경험을 길러줘 평생 책을 읽는 사람으로 양성한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딱딱한 내용은 줄어든다. 문법 지식은 줄이고 실제 언어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간소화된다. 학생들이 자주 접하는 소셜미디어(SNS) 등에서 쓰이는 언어를 비판적으로 배우는 ‘언어와 매체’, 수준 높은 고전을 읽는 ‘고전읽기’ 과목도 신설된다.
송 교사는 “열정이 있는 국어교사라면 힘들고 손이 많이 가도 제대로 된 독서수업을 해보고 싶어 한다”며 “교육 당국은 물론 학부모 등이 교사를 믿어주고 응원해줘야 현장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2015 개정 교육과정’수업 이렇게 바뀐다 (상)] 5지 선다형 탈피 한 학기 책 한 권
입력 2016-02-04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