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9월 현재 근무하는 영훈고등학교로 전근을 오게 됐다. 나는 79년부터 81년까지 영훈고를 다닌 졸업생이다. 영훈고 출신 동문 교사로 모교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97년 고1 남학생 담임을 맡았을 때다. 첫날 첫 시간에 아이들 자리 배치를 하고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자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왜 자리에 들어가지 않니?”
“선생님, 제가 몸이 좀 아파서요.”
그 아이는 다섯 손가락 중 세 손가락의 세포가 죽어 있었다. 그리고 허벅지가 매우 가늘었다. 근육병이었다. 자세히 말해 루게릭 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우리 반에 들어온 것이다. 아뿔싸. 내가 도울 수 없는 것이 있다니…. 잘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의 사랑으로도 죽어가는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자괴감에 빠졌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울고 있는 내게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 새벽기도를 나가보지 않을래요. 새벽기도는 응답이 100%가 아니야. 200%야.”
번쩍 눈이 뜨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새벽기도에 나갔다. 당시 기도를 잘 할 줄 몰라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까? 계시다면 우리아이 좀 살려주세요. 너무 불쌍하잖아요.”
울며 기도했다. 밤에는 선생님들과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그 아이 생각에 또 울었다. 어설픈 신앙인이긴 했지만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 학교에서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아이를 붙잡고 기도했다.
얼마나 울며 기도했는지 어느 날엔 아침에 일어났는데 쌍꺼풀이 없던 눈에 쌍꺼풀까지 생겼다. 그리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울보선생’이 됐다.
그렇게 6개월 남짓, 옆 반의 한 남자아이가 수업 후 복도로 달려 나왔다. 그러면서 자기도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며 왼팔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루게릭 병에 걸린 두 명의 아이를 내 앞에 데려다 놓으셨다. 두 아이를 붙잡고 기도했다. 아이들이 힘들어 할 때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응급실에 가야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하셨다. 근 3년간 기도가 계속됐다. 하지만 대입수능시험을 보기 일주일 전 아이들의 몸은 악화돼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은 의사가 얘기하던 마지막 때가 다 됐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죽는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아이들이 내가 기도하자니까 기도를 하긴 했지만 자기들의 입술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복음을 다시 전하고 아이들에게 영접기도를 따라하라고 권했다. 또 대입수능시험을 무사히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때 교회에서 제자훈련 중이었던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3장 16절이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두 아이는 수능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그리고 그해 겨울방학 아이들에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아이들의 병이 진행을 멈추고 건강이 차츰 회복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이 병 고침을 받는 과정을 통해 어설픈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던 나를 기도하는 교사로 만들고 계셨다. 할렐루야!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역경의 열매] 최관하 <3> 루게릭병 학생 2명 놓고 3년간 날마다 눈물기도
입력 2016-02-02 18:41 수정 2016-02-02 2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