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열악한 보건 인프라 지카바이러스 ‘온상’이 됐다

입력 2016-02-02 04:09



전 세계가 지카바이러스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집트숲모기를 매개로 전염되는 지카바이러스는 임산부가 감염될 경우 신생아의 두뇌 발육을 저하시키는 선천성 기형인 소두증(小頭症)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질에서 지난해 10월 이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창궐한 이후 4180명의 태아가 소두증 진단을 받았다. 콜롬비아나 엘살바도르 등 다른 중남미 국가에서도 대규모로 감염자가 속출하면서 열악한 보건 인프라 문제와 더불어 낙태 허용 논란까지 불거지는 등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최근에는 중남미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태국 인도네시아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덴마크 호주 뉴질랜드 등 아시아, 유럽을 망라한 다른 대륙까지도 바이러스 감염 사례가 잇따라 발견됐다.

◇열악한 보건 인프라, 지카바이러스 키웠다=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의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회계사 스테파니 라미레스는 임신으로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별다른 증세가 없었지만 그녀는 지카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모기로 전염되는 바이러스가 태아의 소두증을 초래할 수 있다며 정부가 2년간 피임을 권고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그나마 그녀는 운이 좋은 편이다. 정부에서 파견되는 의사가 정기적으로 가정 내 초음파 검사를 해주는 관리대상 122명에 들었기 때문이다. 갱단의 세력 다툼이 치열한 이 나라에서는 정부의 치안력 못지않게 보건 인력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부지기수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지난해 살인 등 폭력행위로 6657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대로 된 상하수도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것도 큰 문제다. 상수도가 연결되지 않은 빈민가의 경우 식수 등 용도로 며칠간 사용할 물을 양동이에 퍼놓는데 이곳이 지카바이러스를 옮기는 ‘이집트숲모기’ 등의 온상이 돼가고 있다. 보건 당국과 의사들은 주민들에게 수시로 주택가 인근의 웅덩이를 없앨 것을 촉구해 왔지만 좀처럼 실현되지 않고 있다.

또 10대에 임신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지만 피임에 대한 인식조차 희박하다고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이는 비단 엘살바도르뿐만 아니라 치안 및 보건 인프라가 열악한 중남미 지역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이다.

◇초유의 사태 앞에 중남미서 낙태 허용 논란까지=지카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소두증 우려가 높아지면서 중남미 지역에서는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도 뜨거워지고 있다. 지카바이러스로 인한 기형아 출산 위협이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엄격한 가톨릭 문화로 대부분 나라들이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살바도르에서는 낙태 여성은 이유와 상관없이 징역형에 처하며, 콜롬비아나 에콰도르, 자메이카 등 국가에서도 여성이 성폭행으로 임신한 경우 등에만 낙태를 할 수 있다.

문제는 기구와 정보 부족으로 피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데다 치안 부재로 성폭력이 빈번한 곳이 많아 정부가 단지 주민들에게 ‘임신 자제’를 권고하는 수준으로는 지카바이러스로 인한 기형아 출산을 막기 어렵다는 점이다. 소두증 상태로 태어난 아기는 대부분 출생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하며, 살아남더라도 지적장애나 시각장애, 발달지연 등 영구 장애를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180여개국에서 활동하는 비영리단체인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은 “지카바이러스 감염 임신부가 불법 낙태 수술이나 시술 등을 받다가 숨지는 사례가 늘 수 있다”면서 감염자에 한해서라도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비영리단체인 ‘여성 출산(Women Deliver)’의 카티야 이베르센 회장도 “피임과 낙태 기회를 보장하지 않은 채 임신을 미루라는 것은 싸구려 정책에 불과하다”면서 “바이러스 확산 여부에만 초점을 맞춘 WHO의 대응도 마찬가지다. 감염 피해를 떠안는 여성의 건강과 관련한 대책은 거의 없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소두증이 ‘생존 가능성이 없는’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중남미 국가 가운데 낙태에 관해 비교적 관대한 국가로 꼽히는 브라질 정부도 이 같은 이유로 지카바이러스 감염에 따른 낙태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경우, 임신 유지 시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 태아가 무뇌증 등으로 생존 가능성이 없는 경우 등에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에 브라질의 한 생명윤리 관련 연구소는 여성의 피임·낙태 권리와 바이러스 감염 진단 기회를 보장해 달라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빨간불’ 켜진 리우 올림픽, 국제 체육행사 계기로 바이러스 퍼질까 국제사회 촉각=오는 8월 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하계 올림픽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올림픽 개막 전까지 이집트숲모기 박멸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하며 이를 위해 전체 군 병력의 60%가 넘는 22만명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에스타두 지 상파울루 등 현지 언론들은 올림픽 기간까지 모기 박멸도 어려울뿐더러 방문객들의 바이러스 감염을 완벽히 통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방문객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귀국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브라질 정부와 미국의 대형 제약업체들이 지카바이러스 백신 개발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백신이 언제 개발될지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리우 올림픽에 참가하는 각국 대표단과 방문객들에게 모기 살충제를 자주 사용하고 가능하면 반바지와 소매 없는 옷을 입지 말라고 권고했다. IOC는 특히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자 선수들에게는 반드시 의료진과 상담할 것을 촉구했다.

WHO 미주지역 본부(PAHO)는 또 다른 모기 전염병인 뎅기열 사례를 고려할 때 아메리카 대륙의 지카바이러스 감염자가 내년까지 최대 400만명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바인 알리히에리 전염병 대응팀장은 “아직 지카바이러스에 면역력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모기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데다 감염되더라도 아픈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조용하게 확산하고 있다”며 이같이 추정했다.

남미에서는 지카바이러스 확산과 동시에 희귀병인 ‘길랭-바레 증후군’까지 급속히 확산돼 우려가 커지고 있다. 환자의 면역체계가 신경세포를 공격해 전신마비로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 증후군은 성인도 걸릴 수 있는 질환이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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