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남편 이어 딸까지 잃어가며 조선여성 치료

입력 2016-02-01 19:58
한복을 입은 홀 부부의 두 남매 셔우드와 이디스. 1897년 조선으로 돌아올 때 찍은 사진이다. 하희정 박사 제공
평양 광혜여원에서 수술을 하고 있는 로제타(왼쪽 두 번째) 모습. 하희정 박사 제공
민들레 홀씨가 피워낸 사랑 꽃

1895년 고향으로 돌아온 로제타는 지친 몸을 추스르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했다. 우선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박에스더를 위해 출산한 지 한 달 만에 학교를 찾았다. 박에스더의 미국 유학은 로제타가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일로 에스더의 남편인 박유산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두 사람의 미래는 곧 조선의 장래와 직결된 문제였다. 리버티공립고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박에스더는 한 학기 만에 대학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제타는 그를 뉴욕으로 보내 어린이병원에서 일하면서 대학을 준비하도록 했다. 라틴어 수학물리학 등은 개인교습을 받게 했다. 박유산은 로제타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박에스더의 학비를 마련했다.

고향에서 3년 보낸 후 다시 평양으로

박에스더와 박유산에게 좌절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에스더는 두 번째 아이까지 조산하고 결국 그 아이마저 잃으면서 공부했으나 로제타가 졸업한 명문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 진학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귀국하기 원하는지 묻는 로제타에게 박에스더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준비될 때까지 당신이 먼저 가엾은 우리 자매들 곁으로 돌아가 그들을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도 제가 의사가 되길 원합니다. 지금은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박에스더는 1896년 신생 볼티모어 여자의과대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훗날 존스 홉킨스대학으로 발전했다.

로제타는 조선 땅에 묻힌 남편의 추모문집 발간도 함께 진행했다. 1897년 8월 출간된 ‘윌리엄 제임스 홀의 생애’가 그 열매다. 책의 수익금은 남편의 뜻을 살려 세운 평양의 기홀병원에 운영자금으로 보냈다. 기홀병원은 가족과 동료들이 모아준 위로금을 ‘씨앗기금’으로 내놓으면서 세워졌다.

낯선 땅 조선에서 아빠 없이 자라게 될 어린 두 남매를 위한 미래 선물도 잊지 않았다. 바로 가족의 뿌리를 알려주는 일이었다. 로제타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 번도 본적 없는 윌리엄 홀의 가족들을 만나러 캐나다를 방문했다. 박에스더 부부도 동행했다. 그곳에서 가족사를 조사한 후 두 아이의 육아일기에 각각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가족 역사를 4대까지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 뿌리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다. 로제타는 스물한 살에 이미 자신의 가족사를 기록할 만큼 일찍부터 역사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늘 무언가를 자세히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윌리엄 홀의 고향 사람들도 교회 마당에 홀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워 그를 기억하고자 했다.

고향에서 3년을 보낸 로제타는 1897년 서울을 거쳐 이듬해 봄, 두 아이와 함께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조선에서 낳은 아들 셔우드 홀은 네 살, 미국 고향에서 낳은 딸 이디스는 세 살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도착한 지 5일 만에 딸 이디스가 이질에 걸리고 말았다. 하얀 민들레꽃을 유난히 좋아했던 이디스는 고열에 시달리다 20여일 만에 아빠 곁으로 떠났다. 로제타는 그 고통의 시간을 육아일기에 상세히 적었다. “눈을 크게 뜨고 엄마를 바라본 채, 작은 영혼이 서서히 떠나갔다.” 아들 셔우드는 마지막 선물로 하얀 토끼풀꽃을 한줌 꺾어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의 손에 쥐어주었다.

사랑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듯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막다른 길 끝엔 언제나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작은 샛길이 숨어 있다. 로제타는 남편과 어린 딸을 잃고 조선 여성들과 아이들이 처한 고통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젊은 아낙의 외로움과 자식을 마음에 묻은 어미의 마음은 동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고통에 대한 공감이 로제타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딸을 보내고 한 달이 안 된 1898년 6월 18일, 로제타는 ‘광혜여원’을 개원했다. 평양에도 여성들을 치료하는 첫 진료소가 생긴 것이다. ‘널리 은혜를 베풀라’는 의미가 담긴 진료소 이름은 아내를 치료해줘 고맙다며 평양 감사가 지어주었다. 진료소를 방문할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해 로제타는 시골왕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4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평양은 선교금지구역이었기에 초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계기로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윌리엄 홀의 거룩한 희생이 그 씨앗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평양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스스로 사지(死地)를 찾은 외국인 의사에게 감동했다. 또 그 부인은 어떤가. 남편에 이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까지 잃어가며 조선 여성들을 치료하겠다고 평양에 남아 있는 그 여인에게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는가. 사람들은 홀 부부의 놀라운 희생정신에 감동하며 점점 기독교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00년 1월, 딸의 이름으로 첫 어린이 병동을 세웠다. 미국의 가족들과 친지들의 도움으로 세워진 ‘이디스 어린이 병동’은 평양에서 선보인 첫 서양식 건물이었다. 이디스가 오염된 물로 목숨을 잃은 만큼, 시멘트를 사용해 물탱크도 만들었다. 이 과정도 쉽지 않았다.

평양 사람들은 분지였던 평양이 배와 같다고 믿었다. 그래서 땅을 깊이 파게 되면 평양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관청에서도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여러 차례 찾아가 땅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시멘트와 벽돌로 물 샐 틈 없이 막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간신히 허가를 받아냈다.

로제타는 매년 딸의 생일이 되면 같은 또래의 조선 소녀들과 그의 어머니들을 집으로 초대해 생일파티를 열었다. 축복은커녕 딸로 태어난 것이 죄인인 양 늘 서럽기만 했던 조선 소녀들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영원한 사랑은 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임을 로제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희정 박사 <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