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가 짧아 다리를 펴지 못하고 이불이 작아 몸을 덮지 못하는 형국. 지금 한국외교가 처한 모습이다. 위안부문제 관련 한·일 합의는 불협음이 끊이지 않고, 남북관계는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한참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 애써 가꿔온 한·중 관계는 부서지고 있다.
외교엔 변수가 참 많아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도·미·솔’의 으뜸화음은 온갖 화음으로 변주되는 기본 고리다. 이때 밑음(根音) ‘도’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밑음은 당연히 한국인데 으뜸고리에 대한 판단과 그 관리 방안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한·미가 으뜸고리라는 주장부터 중국을 감안한 G2 중심론까지 변주는 다양하다.
나는 우리의 으뜸고리는 남북, 그리고 한·일 관계라고 본다. 한반도 문제 해결 없이 한국은 국제사회에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점이 그렇고, 한·일은 역사·영토 문제를 빼놓고는 역내에서 가장 유사한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갈등관계가 깊다는 점은 그만큼 한·일 고리가 비켜갈 수 없는 주요 모순, 즉 으뜸고리임을 웅변한다.
그간 우리는 으뜸고리 관리에 소홀했다. 우선 남북문제의 경우. 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3000’, 박근혜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은 북한을 조건부 해법 대상으로만 파악했다. 상대는 절체절명의 생존카드를 꺼내는데 우리는 ‘조건만 채워주면 핵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설 것’이란 순진한 낙관론에 취해 있었다.
평화, 통일, 신뢰, 대박 등 말의 성찬만으론 북한의 마음을 사기는커녕 사태 악화를 막을 수 있을 만큼의 관리능력도 키우지 못했다. 문제가 터지면 미국에 기대고 중국에 부탁할 뿐 주체적으로 풀어보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그야말로 으뜸고리에 대한 집중력 부족이다. 4차 핵실험이 벌어지자 북한을 말려 달라고 중국에 읍소해보지만 그간의 화려한 친밀감은 온데간데없다.
또한 한·일 문제에 대해서도 집중력이 취약하다. 예컨대 위안부 관련 한·일 합의안은 아베 총리의 사죄와 반성을 담았고, 일본정부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진전된 내용이다. 양국 정상이 자국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결단내린 점도 평가한다. 하지만 합의 이후의 관리에 대해서는 양쪽 모두 대단히 미숙하다.
위안부문제는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증언 기자회견을 한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 25년이나 된 만큼 이를 둘러싼 시민사회의 관심과 노력이 강하게 개입돼 있다. 이를 감안할 때 그 어떤 합의안이든 곧바로 수용되기는 어렵다. 이들의 활동 여지를 고려해 그간의 노력이 새로운 지평으로 활발하게 펼쳐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소통·배려 부족 탓이 크다. 합의 이후 일본의 반응에 대해서도 일일이 대응하기보다 으뜸고리 관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일본정부가 엉뚱한 발언을 하면 할수록 국제사회는 일본을 폄하할 뿐이다.
꼬여버린 으뜸고리는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으뜸고리 관리가 가능할 때 미·중과의 버금고리도 자연스럽게 힘을 받게 된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우리는 통일을 말할 수 있으며 역내 평화연대의 중심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으뜸고리를 경시하고 주체성을 잃고 겪는 비극은 역사가 증언한다. 2700여년 전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된 채 강대국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었는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들 강대국에 매달렸다. 그 끝은 패망이고 파멸이었다.
“이집트로 내려가서 바로의 보호를 받아 피신하려 하고 이집트의 그늘에 숨으려 하는구나. 바로의 보호가 오히려 너희에게 수치가 되고 이집트의 그늘이 오히려 너희에게 치욕이 될 것이다.”(이사야 30:2b∼3)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조용래 칼럼] 한국외교 으뜸고리가 꼬였다
입력 2016-01-31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