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영문도 모른 채 22세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던 ‘이태원 살인사건’의 피해자 조중필씨. 그를 살해한 ‘진범’을 밝혀낸 증거는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혈흔(血痕)이었다. 칼에 찔린 조씨의 목과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칼을 쥐고 있던 ‘살인자’의 손목과 온몸에 묻었다. 법원은 사건 발생 직후 아서 존 패터슨(37)이 양손과 머리를 씻고, 옷을 갈아입은 점에 비춰 그가 범인이라고 판단했다.
‘진범은 패터슨’ 판단 근거
1997년 4월 3일 밤 10시 서울 이태원의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밀실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만 17세였던 에드워드 리(37)와 패터슨은 화장실로 들어가는 조씨를 뒤따라갔고, 이들이 나온 뒤 조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남았다. 패터슨과 리는 서로 상대방이 조씨를 찌르는 것을 본 ‘목격자’라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심규홍)는 이 사건을 크게 3가지 상황으로 나눠 판단했다. ①패터슨과 리가 우연히 화장실에 갔다가 누군가 조씨를 찌르는 걸 목격했을 가능성. 재판부는 “패터슨과 리가 ‘뭔가 보여주겠다. 화장실로 가자’는 대화를 주고받았다”며 “제3자의 범행을 우연히 봤거나, 범행 계획 없이 화장실에 갔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②두 사람이 칼을 주고받으며 같이 찔렀을 가능성. 재판부는 “조씨는 살해당하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며 “짧은 시간에 서로 칼을 주고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③패터슨 또는 리가 조씨를 살해하고, 다른 한 사람이 목격한 상황에 대한 판단이었다. 결정적 증거는 조씨가 남긴 혈흔에 있었다. 재판부는 “범인은 조씨와 근접한 상태에서 칼로 목을 찔렀다”며 “현장 혈흔과 조씨의 상처 부위 등을 보면 범인의 상하의와 특히 칼을 쥔 오른쪽 팔목에 피가 많이 묻게 될 것임이 명백하다”고 봤다. 조씨의 피를 더 많이 뒤집어쓴 건 패터슨이었다.
재판부는 “패터슨은 범행 직후 건물 4층으로 올라가 화장실에서 머리와 양손을 씻고 친구의 셔츠로 갈아입었다”며 “반면 리는 곧바로 다른 친구들에게 갔고, 옷에는 스프레이로 뿌린 정도의 피가 묻어 있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범행 경위에 대한 리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취지다.
“리 역시 공범이지만…”
그러나 법원은 리 역시 살인사건의 공범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리는 이 사건 범행을 부추겼고, 조씨가 수차례 칼에 찔리는 상황에서도 말리거나 구호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되레 친구들에게 범행을 과시했다”고 꾸짖었다. 다만 리는 99년 살인 혐의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터라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처벌되지 않는다.
재판장 심규홍 부장판사는 “조씨의 사망으로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누나들은 사랑하는 남동생을 잃었다”며 “가족의 고통은 19년이 지난 현재까지 오롯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패터슨에 대해 무기징역형을 선택했지만 당시 만 18세 미만 소년인 관계로 20년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지난 19년간 법은 그대로였지만 ‘진범’은 바뀌었다. 선고 직후 조씨의 모친 이복수씨는 “중필이가 이제 마음이 편할 거 같다”면서도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판결이 바뀔까 걱정된다”며 울먹였다. 패터슨의 변호인은 항소하겠다고 했다. 패터슨은 재판부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 교도관 6명에 둘러싸여 법정을 떠났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관련기사 보기]
[‘이태원 살인’ 패터슨 1심 20년형] “혈흔은 그날의 진실을 말한다”… 19년 만에 法의 심판
입력 2016-01-29 17:29 수정 2016-01-29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