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사 바른 이름은 김란사 기생 출신 첩 아니다”… 남동생 손자 김용택씨 “신상 기록 잘못” 증언

입력 2016-01-29 21:04
하란사는 조국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공부한 ‘신여성’이었다. 사진은 미국 오하이오 주 웨슬리안대학 재학 시절로 하란사가 성경을 들고 앉아 있다. 김용택 제공
관복을 갖추고 찍은 사진으로 인천 감리 당시로 추정된다. 하란사와는 1893년 혼인을 올렸다. 김용택 제공
남동생 손자 김용택씨
유관순 열사의 스승 하란사(河蘭史·본명 김란사)의 일대기가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이화학당 출신의 박에스더가 의대생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다면 하란사는 인문계에서 처음으로 미국에 유학, 문학사 학위를 받은 ‘신여성’이다. 특히 조선 여성의 처지를 ‘꺼진 등불’로 묘사하며 이화학당에 입학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가운데 하란사의 신상 기록 일부가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란사 남동생의 손자 김용택(68·사진)씨는 2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국민일보를 방문, 하란사 선생의 생전 사진들을 보여주며 “할머니는 기생 출신으로 관리의 첩으로 산 것이 아니다”며 “무역업을 하는 집안 장녀로 태어나 당당히 공부해 조국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하란사의 남동생, 김동연(金東淵)의 장남 김정국(金正國)의 5남이다. 하란사는 딸이 한 명 있었으나 일찍 숨졌다.

김씨가 밝힌 대표적 오기(誤記)는 하란사의 출생지와 본관, 출신 배경이다. 김씨에 따르면 하란사는 1872년 평양에서 부친인 김병훈과 모친인 이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후 한양(서울)으로 이사해 서울 평동 32번지에서 부모에게 한학을 배우며 부친의 무역업을 도왔다. 1911년 부친은 무역업에 전념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주했다.

하란사라는 이름은 이화학당 입학 후 세례를 받고 ‘낸시(Nancy)’라는 이름을 얻은 뒤 한문식으로 바꾸어 ‘난사(蘭史)’라 붙여졌다고 한다. 성씨도 남편 성을 따라 ‘하란사’ 또는 ‘김하란사’로 불렸다는 게 대체적 정설이다.

김씨는 “당시 여자들은 이름이 없었다. 세례명을 받았다는 얘기는 나중에 역사가들에 의해 쓰여진 것 같다”며 “원칙적으로는 ‘김란사’가 맞다. 하란사란 이름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 입국심사관이 남편 성을 묻자 ‘하’씨라고 답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말했다.

하란사의 출생 연도도 1875년이 일반적 기록이지만 이보다 3년 앞선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김씨는 “미국 출입국심사 기록에서 1872년으로 나온다”며 “이는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본관 역시 김해 김씨가 아니라 전주(全州) 김씨라고 했다.

가장 큰 오해는 하란사가 기생 출신으로 남편인 하상기의 첩이 됐다는 설(說)이다. 김씨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글 쓰는 이들이 확인 없이 인용했다”며 “할머니는 무역업을 하던 부친 밑에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으며, 결혼 역시 하상기의 전처인 조씨 부인이 사망한 이후 시집을 갔다”고 반박했다.

캄캄한 조국의 현실

하란사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것을 보고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하지만 공부하기 위해 찾아간 이화학당은 입학을 거부했다. 하란사가 기혼여성인 데다 유력한 집안이라는 게 이유였다. 하란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 학교를 찾았고 하루는 교장 룰루 프라이 앞에서 등잔불을 직접 끄면서 말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어머니들이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의연한 조선 여성의 발언 앞에 프라이 교장도 어쩔 수 없었다. 학비는 자비 부담하겠다는 조건으로 하란사를 입학시켰다. 이 일화는 선교사였던 프라이 교장이 미국에 보낸 보고서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이후 하란사는 공부에 온 힘을 쏟았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도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에서 1년을 공부했다. 한국에 돌아와 정동교회에서 서재필의 ‘미국의 남녀 평등한 활동’이란 강연을 듣고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1897년 12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하란사’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1898년부터 2년간 워싱턴DC의 하워드대학과 디커니스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이어 1900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해 문학을 공부하고 1906년 졸업,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고혜령 박사는 “하란사는 열렬하고 치열한 성격의 여성이었다”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교육받은 게 아니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고 평가했다.

하란사 귀국 후 국내에서는 여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됐다. 숙명과 진명여학교 등이 세워졌고 정부에서는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여성 3인에 대해 환영 행사를 열었다. 1909년 황성신문(5월 5일자)은 “박에스더와 하란사, 윤정원씨가 귀국해 여자 교육에 종사함과 생명에 근무함을 감복해 경희궁에서 환영회를 열었다”며 “여자를 교육함은 초유한 미사(美事)라 여자 학업이 앞으로 발달됨은 가히 찬하하겠도다”라고 밝혔다. 고종 황제는 이때 직접 은장을 수여했다.

하란사는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을 도와 여성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면서 이화학당에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以文會)’를 조직, 지도했는데 여기서 유관순은 이문회 회원으로서 하란사의 지도를 받았다. 이듬해인 1910년 9월 이화학당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하란사는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참여했다. 하란사는 교사와 기숙사 사감을 거치며 이화학당의 교감으로서 활동했다.

열렬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여성

하란사는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에서 앨버슨 선교사와 함께 교회 부인영어학교를 부인성경학교로 바꾸며 전도부인 양성에 힘을 썼다. 전도활동도 열심이었던 하란사는 1911년에만 14차례 전도를 나갔으며 1426차례 가정 방문을 했고 250여명의 여인들이 교회에 나왔다.

하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 총회에 참석했다. 마침 이 무렵 시카고대에서 신학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을 보내기 위해 재미한인 동포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순회강연을 다녔다. 은혜로운 예배를 돕자는 게 취지였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애국운동에 참여하도록 종용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그렇게 모금운동을 벌여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정동교회에 설치됐다. 오르간은 하란사의 나라사랑과 민족애가 녹아있는 애국의 상징이었다. 후손인 김씨에 따르면 하란사는 오르간이 정동교회에 설치되자 직접 연주를 했으며, 연주를 들었던 교인 모두가 감격해 울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하란사는 이듬해 4월 10일 파리국제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비밀 파송됐다가 중국의 베이징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는 증언으로 독살설이 유력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하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순자 박사는 “미국 유학 최초 문학사 출신이라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의연히 살았던 하란사 인생 전체를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