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개울가 빨래터는 사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토닥여주는 곳이었다. 집집마다 보급된 세탁기는 빨래를 귀찮은 노동으로 전락시켰다.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던 ‘빨래터의 풍경’이 도심에 잇따라 둥지를 틀고 있다. 동전을 넣고 세탁부터 건조까지 해결하는 ‘코인 빨래방’은 현대인의 빨래터가 됐다. 이곳에선 어떤 이야기가 오가며, 어떤 일상이 펼쳐지고 있을까. 27일 오전 10시부터 다음 날 같은 시간까지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빨래방에서 드나드는 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오해를 사지 않도록 미리 주인에게 허락을 맡았다.
“옛날 시골 빨래터 생각나네”
오전 11시쯤 은평구에 사는 김모(62·여)씨가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동네에 사는 친구 소개로 찾아왔다고 했다. 강추위로 베란다에 있던 세탁기가 얼어붙어 남편과 아들까지 세 식구 빨랫감이 2주째 밀렸다. 대형 세탁기 2대에 옷과 이불을 나눠 돌렸다. 세탁기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김씨는 친구와 빨래방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 기분은 해보지 않으면 몰라. 운치도 있고 놀러온 느낌도 들고.” 빨랫감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와 빨래를 하니 ‘개울가 빨래터’가 생각난다고 했다. “아우 보송보송해. 기분 정말 좋다. 이거 버릇 들면 어떡하지?” 코인 빨래방은 처음이라는 그는 건조까지 끝낸 옷가지를 꺼내며 환하게 웃었다.
500원 동전을 넣는 세탁기와 건조기는 24시간 ‘대기’ 상태다. 소형 세탁기는 3000원, 대형은 5000원이고 25분 정도 걸린다. 건조기는 3500원에 28분 정도 돌아간다. 1만원도 안들이고 한 시간 안에 빨래와 건조를 마칠 수 있다. 빨래방에 놓인 TV는 30여분이 지나자 자동으로 꺼졌다. 사람들이 언제 떠날지 몰라 ‘타이머’를 달아 놓은 것이다.
‘빨래방’에서 ‘빨래방’을 노래하다
오후가 되자 ‘홍대에서 음악을 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새벽까지 음식점에서 일을 했다는 래퍼 고윤우(27)씨는 오후 3시쯤 빨랫감을 들고 왔다. 그는 4년 전부터 홍대에서 음악을 하며 지내고 있다.
고씨는 자신을 ‘음악 하층민’이라고 표현했다. 음식점에서 일하고 한 달에 170만원 정도 번다. 월세 50만원에 생활비까지 쓰고 나면 악기 살 돈도 부족하다. 홍대의 한 작업실을 빌려 살고 있는데 그곳엔 세탁기가 없다. 일반 세탁소는 가격도 부담스럽고 양말과 속옷까지 빨아주지 않아 빨래방은 그에게 ‘필수품’이다. 빨래방을 주제로 랩을 부탁했다. “따뜻하게 건조 중인 빨래, 이 추운 겨울 내 마음을 달래.” 건조기 소리에 맞춰 멋진 랩이 리듬을 탔다.
오후 7시쯤 젖은 이불을 들고 빨래방에 나타난 김봉수(21)씨에겐 세탁기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1층 수도관이 동파돼 지하 단칸방에 물이 가득 찼단다. 펑크음악을 한다는 그는 “바지 밑이 자꾸 터져서 ‘김펑스’라는 별명을 지었더니 이제는 하수도까지 터진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김씨는 월세 24만원에 3평 남짓한 공간에서 산다.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중앙대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는 시간에 밴드 활동을 한다. 대표곡은 그가 처음 만든 ‘× 같은 하루’. ‘× 같은 하루살이 끝나고 나면 지겹고 지겨운 내일이 온다’는 가사다.
빨래방을 주제로 한 소절을 부탁하자 “세탁기도 24시간 돌잖아요. ‘오늘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내 인생, 언제쯤 나는 쉴 수 있을까’ 뭐 이런 슬픈 노래가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자정 직전, 청년 두 명이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들어왔다. 27일의 마지막 손님이자 28일의 첫 손님이다. 양형균(19)씨와 이강현(18)씨는 힙합을 좋아해 3일 전 홍대 근처에 방을 구했다고 했다. 둘이라 조금 큰 방을 선택했는데 세탁기가 없다고 했다. 다음 주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이씨는 ‘졸업’과 ‘시작’을 주제로 곡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세탁기 도는 걸 보면서 “자취하고 처음 와본 빨래방에서 시작해 맨 위까지 갈래 난”이라고 랩을 했다. 비슷한 발음의 ‘빨래방’과 ‘갈래 난’으로 운율을 맞추며 새 출발의 의지를 담았다.
당장 빨래가 필요한 사람들
빨래방 고객은 ‘당장’ 빨래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세탁소에 맡기면 2∼3일은 걸린다.
오후 4시쯤 저녁 영업을 준비하는 근처 식당에서 앞치마를 잔뜩 들고 왔다. 헬스장에선 수건을 들고 찾아왔다. 오후 8시쯤 빨래방에 온 한 여성은 “자취하는 딸이 갑자기 오늘 저녁에 온다고 연락했다. 오랜만에 오는데 잘 재우고 싶어 이불빨래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오후 11시가 되자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잡은 외국인 관광객도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웬디(22·여)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신디(24·여)는 중국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겨울방학을 이용해 열흘 일정으로 한국에 왔다. 이날이 한국의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하는 탓에 물어물어 빨래방에 왔다는 그들은 다른 이들이 세탁기와 건조기 이용하는 방식을 힐끔힐끔 보면서 따라했다.
빨래방에는 가끔 추위를 피해 오는 노숙인도 있다고 한다. 건조기의 훈훈함이 남아서다. 밤새 기다렸지만 ‘새벽손님’은 오지 않았다. 아침 출근시간이 지나고 거리가 한산해지자 방학인 대학생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빨래방 세탁기는 다시 분주하게 돌기 시작했다.
글·사진=김판 기자 pan@kmib.co.kr
[‘코인 빨래방’ 24시] ‘현대판 빨래터’엔 고단한 서민 삶이 돌아간다
입력 2016-01-29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