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판정 후 진료비도 유족 부담”… 대법원 첫 기준 제시

입력 2016-01-28 20:52
김모(사망 당시 78세) 할머니는 2008년 2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폐종양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김 할머니는 평소 “내가 소생하기 힘들거든 (인공)호흡기는 끼우지 마라. 기계로 연명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말해 왔다. 실제 회복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자녀들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병원 측은 거부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뇌사자의 인공호흡기를 떼는 행위에 살인죄가 적용되고 있었다. 자녀들은 결국 ‘시간의 경과에 따라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며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09년 5월 김 할머니의 뜻과 자녀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해 6월 23일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가 제거됐다. 국내 첫 존엄사 집행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 없이도 201일을 더 살다 2010년 1월 숨졌다.

존엄사 집행을 두고 1년간 법정다툼을 벌였던 병원과 유족은 병원비를 두고 다시 맞붙었다. 병원 측은 연명치료를 중단한 이후부터 사망 시점까지의 병원비를 유족이 내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반면 유족들은 연명치료 중단이 결정되면서 진료계약이 해지된 것으로 봐야 하므로 병원비를 낼 수 없다고 맞섰다.

1·2심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문이 병원에 송달된 2008년 12월 4일을 의료계약 해지 시점으로 봤다. 이후 진료에 대해선 유족이 병원비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2심은 인공호흡기 부착 외에 최소한의 생명유지를 위한 진료와 병실 사용에 관한 의료계약은 계속 유지된다며 1심 결론을 뒤집었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28일 병원의 손을 들어준 2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법원이 중단을 명한 연명치료를 제외한 나머지 의료계약은 존속된다”고 밝혔다. 법원이 인공호흡기를 통한 연명치료 중단만 명령했기 때문에 나머지 진료에 부과된 병원비는 유족이 내야 한다는 설명이다. 병원은 인공호흡기 제거 이후에도 김 할머니에게 인공영양·수액을 공급하고, 항생제를 투여했었다. 유족이 내야 할 병원비는 8643만7000원이다.

국회는 지난 8일 연명치료 중단 요건을 정한 ‘웰다잉법’을 통과시켰다. 2018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대법원 판단이 연명치료 중단 결정의 범위와 효력 등에 대한 실무상 중요한 해석지침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