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가 ‘떠오르는 큰손’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 방문을 이유로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품이자 역사적 유물인 누드 조각상들을 흰 패널로 감춰버렸다. 이란이 인간을 형상화한 조각품 등을 우상숭배로 여기는 이슬람 국가라는 이유에서다. 다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순수한 존중이었을까, 아니면 지나친 비위 맞추기였을까.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등은 26일(현지시간) 로하니 대통령에게 이탈리아가 보인 이례적인 ‘예의’에 대해 나라 안팎에서 비난과 조롱이 빗발치고 있다고 전했다.
로하니 대통령과 렌치 총리는 25일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인 카피톨리니 박물관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대 조각상이 많이 전시돼 있고 그중에는 누드 조각상도 있다. 렌치 총리는 당시 회담장에 있었던 로마제국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조각상을 제외하고 비너스상을 비롯해 다른 전시실에 있는 누드 조각상을 모조리 커다란 흰색 패널로 가렸다.
유럽 언론들은 이탈리아의 행동에 대해 “굴욕적”이라고 비난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란 대통령이 로마 방문에서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예민한 이탈리아 관료들이 누드상을 가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중도우파 성향인 이탈리아형제당의 조르지아 멜로니 대표는 “렌치 총리의 문화적 ‘복종’이 정도를 지나쳤다”면서 “27일 카타르 왕 방문 때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거대한 박스로 덮기라도 할 것이냐”고 정부를 조롱했다. 정치비평가 주세페 무스마라는 허핑턴포스트 이탈리아판에 “이런 창피를 감수해야 할 필요가 정말 있었느냐”며 “조각상을 가린 것은 우리의 예술과 문화를 부정하고 모든 세속주의의 원칙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탈리아 네티즌들은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statuenude(누드상)’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자국의 유명 누드 조각상 사진들을 잇따라 올리며 정부에 항의를 표시했다. 박물관을 운영하는 로마시 대변인은 “예술품 전시 관리는 총리실에서 직접 주관한 일”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놨다.
이탈리아가 이슬람 국가와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누드 조각상을 가린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셰이크 무하마드 빈 자예드 빈 술탄 알 나얀 아부다비 왕세자가 방문했을 때는 피렌체에 있던 제프 쿤스의 작품 ‘응시하는 공(Gazing Ball)’이 가려진 바 있다.
로하니 대통령이 무슬림 지도자임을 고려해 렌치 총리와의 만찬 자리에는 와인도 제공되지 않았다. 로하니 대통령은 이탈리아 기업들과 170억 유로(약 22조10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며 이탈리아 정부의 각별한 배려에 화답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27∼28일에는 지난해 파리 테러 때문에 취소했던 프랑스 방문에 나선다. 이란 측은 프랑스에 28일 로하니 대통령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오찬 때 와인을 빼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자국 전통인 와인을 오찬에서 뺄 수 없다고 맞서면서 결국 양국 정상은 식사는 함께하지 않고 오후에 정상회담과 계약 체결식을 열기로 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바티칸은?”… 누드상 가렸다가 조롱당한 伊 정부
입력 2016-01-28 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