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일본 나라시의 박물관 ‘야마토분칸(大和文華館)’에서 경매를 겸한 고려 불화 전시회가 열렸다. 고려 불화 소식을 듣고 국립중앙박물관이 먼저 구입을 타진했으나 워낙 값이 비쌌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나섰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야마토분칸은 한국에는 불화를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뭔가 다른 수를 내지 않으면 우리 보물을 놓쳐버릴 상황이었다. 이 회장은 그 불화를 일단 미국으로 빼라고 지시했다. 미국의 삼성물산 지사를 동원해 불화를 구입한 뒤 한국으로 들여왔다. 나중에 국보 제218호로 지정된 ‘아미타삼존도’는 그렇게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이병철 회장의 컬렉션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얘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도 부친 못잖은 컬렉터였다. 경영 수업을 받는 동안 골동품 수업을 은밀하게 병행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이병철 회장이 ‘청자 마니아’라면 이건희 회장은 ‘백자 마니아’였다. 또 이병철 회장은 비싸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누가 뭐래도 구입하지 않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좋다는 확인만 있으면 값을 따지지 않고 샀다.
이건희 회장은 “특급이 있으면 컬렉션 전체의 위상이 덩달아 올라간다”는 지론을 가진 ‘명품주의자’였다. 호암 컬렉션에는 사실 명품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삼성가가 보유한 150점이 넘는 국보급 유물 중 상당수는 이건희 회장이 추진한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를 통해 수집됐다.
삼성가의 보물 이야기가 공개됐다. 1976년 삼성문화재단에 특채된 이후 1995년까지 20년간 근무하면서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을 전담하고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 건립을 주도했던 이종선씨(68·전 호암미술관 부관장)가 ‘리 컬렉션’을 출간했다. 이씨는 “삼성가 2대를 거쳐 온 수집 활동은 어느덧 우리나라 미술사를 아우르는 무수한 걸작들을 그 품속으로 끌어들였고, 시작과 끝에 언제나 내가 있었다”면서 “의도적으로 숨겨졌거나 뜻하지 않게 묻혀졌던 수집 그 뒤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고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현재 서울의 리움미술관과 용인의 호암미술관에는 국보 37건, 보물 115건이 보관돼 있다. 개인 미술관이 국가의 보물을 100점 넘게 갖고 있는 경우는 일본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사례라고 한다. 삼성의 명품 컬렉션은 그동안 이런저런 전시를 통해 공개된 바 있지만 삼성가의 수집 이야기가 그 핵심 당사자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저자는 “이병철로부터 이건희까지 수집과 박물관에 관련된 상세한 에피소드와 내막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라며 “이 이야기를 꺼내는 데 20년을 기다렸다. 참 무던히도 묵혀왔다”고 말했다.
책은 백자달항아리, 고구려반가상, 가야금관, 청자진사주전자 등 삼성가의 대표적인 명품 컬렉션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문화재적 가치와 함께 수집 사연을 들려주는 구성이다. 여기에 이병철 이건희, 두 특별한 컬렉터의 이야기가 더해진다. 그들을 특별하다고 하는 이유는 미술품 수집이 돈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 정주영 회장이나 대우 김우중 회장은 미술품 수집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 국내 어떤 대기업과 비교하더라도 삼성의 수집에 대한 애착은 도드라져 보인다.
“삼성이 박물관을 세울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병철 회장의 수집벽이 있었다. 그의 수집 역사는 줄곧 그의 사업과 함께해왔다. 만약 그에게 수집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리움은 없었을 것이다.”
수집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열망이나 취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사회와 역사에 헌정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삼성가 컬렉션은 한 가문이나 기업을 넘어 한국 미술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이병철 이건희 회장을 다루면서 찬양조로 전락하지 않은 점은 인상적이다. 컬렉션에 대한 해설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다. 평생을 박물관인으로, 미술사학자로 살아오며 가다듬은 저자의 시각과 문체가 날카롭게 드러난다. 이 책에는 삼성가 수집 이야기 외에 두 가지 기획이 더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업가로만 알려져 있는 이병철 이건희 회장을 수집가로 조명하는 것, 그리고 삼성가를 끌어들여 한국 미술사의 빈 칸을 채우는 것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청자에 꽂힌 이병철, 백자‘狂’ 이건희… 우리가 몰랐던 삼성家 골동품 이야기
입력 2016-01-29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