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정세현] 미·중 갈등 속 한국외교의 길

입력 2016-01-27 18:21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중국이 군사적·외교적 ‘굴기’를 시작했고 미국은 중국의 그런 움직임을 견제하고 있다. 미·중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 외교에 시련의 시간이 다가왔다.

후진타오는 정권수립 60주년 기념식(2010년 10월 1일)에서 ‘중화부흥’을 선언했다. 서양세력 앞에 무릎 꿇기 전 중국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뜻이다. 비슷한 시기에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중국을 ‘솟아오르는 국가’로 규정하면서 중국의 부상에 대비하라고 권고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2012년 11월부터 ‘아시아 회귀-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힘을 아시아로 돌려 중국의 도전을 제압하고 미국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진핑은 한수 더 떴다. 취임식(2013년 3월)에서 ‘중국몽’을 선언한 뒤 미국에 가서는 오바마에게 “태평양은 미국과 중국이 나눠 써도 충분할 만큼 넓다”고 말했다. 아·태 국제정치에 중국의 지분을 인정하라는 뜻 아닌가. 결국 ‘중화부흥-중국몽’과 ‘아시아 회귀-아시아 재군형’의 격돌이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중국의 굴기를 막는데 미국의 힘이 좀 부친다. 재정절벽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아시아 쪽 동맹국의 힘을 빌려야 할 형편인데, 마침 일본은 경제력에 걸맞게 군사력을 갖추고 정치적 위상도 높이고자 한다. 안성맞춤 파트너다. 그런 점에서 최근 2∼3년 동안 일어났던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 협정 체결,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 사드 한반도 배치 노력, 위안부 문제 한·일 협상 막후에서 일본 편들기 같은 움직임은 일본을 앞세워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2010년 말부터 북한이 핵 포기 의지를 행동으로 보일 때까지 6자회담에 나가지 않겠다면서 중국이 북한의 그런 행동을 끌어내라고 요구했다. 이런 ‘전략적 인내’ 정책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이 아니다. 북한에 시간을 주어 결국 북핵 능력을 키워줄 것이 뻔한데도 이런 정책을 견지하는 건 북핵을 구실로 중국 압박 명분을 강화하려는 것 아닌가 싶다. 이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전략적 인내’ 정책이 미국의 대중 압박 정책과 한 세트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에 중국은 미국 못지않게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 한국의 무역수지는 대중 무역수지 흑자가 없으면 적자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런 형국이다보니 안보 때문에 미국 편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던 과거와는 다른 외교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생겼다. 박근혜 대통령이 첫 정상회담을 중국과 하고 한·미, 한·중 관계의 균형을 잡겠다고 했던 건 그런 취지였다고 본다. 작년 9월 초에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 한·중, 한·미 관계의 균형을 잡는 의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이런 행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도 대중 압박 정책 대열에 동참시키려 한다.

한국은 안보라는 팔은 미국 손에 잡혀 있고 경제라는 팔은 중국 손에 잡혀 있다. 그런데 미·중 갈등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외교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나. 결국 미·중 등거리 외교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미·중 사이에 있는 우리는 도랑 속에 든 소가 이쪽 둑의 풀도 뜯어먹고 저쪽 둑의 풀도 뜯어먹듯 외교를 해나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미·중 관계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은 시절에 한 말이지만, 미·중 패권 경쟁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요동치는 지금 상황에 오히려 적합한 외교 지침인 것 같다. 문제는 미국 중심 외교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이런 용기와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