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자 SOS, 가족 81%가 몰랐다… 복지부 ‘121명 심리부검’ 통해 원인 첫 공식 분석

입력 2016-01-26 17:39
40대 A씨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가족에게 다정다감했다. 사망 1년여 전 업무 문제로 회사 동료와 갈등을 겪은 뒤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 아내에게 “회사 가기 싫다” “죽고 싶다”고 호소한 적도 있다. 사망 3개월 전부터는 밥도 잘 먹지 않아 예전에 입던 바지가 헐렁해질 만큼 살이 빠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이틀 전 A씨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아내가 왜 우느냐고 묻자 “고맙다”고만 했다.

심리부검 결과 A씨의 말과 행동은 자살하겠다는 ‘신호’였다. 자살한 사람 대부분이 이처럼 경고 신호를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 중앙심리부검센터는 2012∼2015년 자살 사망자 121명을 심리부검한 결과 93.4%가 경고 신호를 보냈다고 26일 밝혔다. 하지만 유족의 81%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심리부검은 가족과 친지 등 주변인을 면담해 자살자의 사망 전 심리 변화를 재구성하고 자살 원인을 추정하는 일이다. 정부가 한국인의 자살 원인을 심리부검을 통해 공식적으로 분석한 것은 처음이다. 중앙심리부검센터는 경찰·정신건강증진센터와 유가족의 직접 의뢰를 받아 지난해 심리부검 작업을 했다.

자살자들이 경고 신호를 보내는 방식은 다양했다. “내가 먼저 갈 테니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라”고 직접 죽음을 언급하는가 하면 “천국은 어떤 곳일까”라며 사후세계를 동경하는 말도 했다. A씨는 아내에게 “내가 없으면 당신은 뭐 먹고 살래?”라고 물었고, 아이들에게는 “형제끼리 우애 있게 돕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말 대신 행동으로 자살을 암시하기도 했다. 현금을 다량 인출해 가족에게 전하거나 평소와 달리 가족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려 했던 경우도 있었다. 머리카락을 염색할 시기가 됐는데 하지 않은 노인도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심리부검센터의 사후 면담에서 유가족의 67%는 사망 후에야 자살 신호를 알아차렸다고 답했다. 14%는 사망 후에도 신호를 인지하지 못했다.

자살자의 88.4%는 우울증 등 정신건강에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꾸준히 치료받은 비율은 15%에 불과했다. 백종우 심리부검센터 부센터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중국·일본은 자살자의 50∼60%가 정신건강 질환을 갖고 있다. 이보다 높은 우리는 서구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자살이 술과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됐다. 자살자의 39.7%는 술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5.6%는 술 때문에 직업 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등 음주가 자살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이었다.

복지부는 심리부검 결과를 바탕으로 동네병원 중심의 ‘정신질환 조기발견 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동네의원에서 자살 위험과 우울증에 대한 선별검사를 할 수 있도록 역할 강화가 필요하다”면서 “다음달 중장기적 정신건강 증진 종합대책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