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최범] 근대화·문명·디자인

입력 2016-01-26 17:51

올해는 한국이 근대화의 길로 접어든 지 140년 되는 해이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1876년 강화도조약이 맺어졌다. 이 최초의 불평등하지만 근대적인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중국 중심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근대 문명과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편입되었다. 이를 우리는 문명개화라고 부른다. 지금 현재의 한국은 이러한 역사의 결과물이다.

1885년에는 갑오개혁으로 인해 단발령이 내려졌고 이어서 복식 개혁도 이루어졌다. 한국인의 스타일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점차 바뀌어갔다. 양관(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근대적인 상품들이 이 땅에 밀려들어왔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과 감수성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디자인의 관점에서 볼 때 문명개화란 일단 삶의 외양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방안에서 큰길까지 죄다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적으로는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와 같은 것이 아닐지 몰라도 우리에게 그것은 실질적으로 동일했다. 모든 가치의 기준이 중국으로부터 서양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근대화는 곧 서구화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근대화의 실상을 이렇게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근대화란 일종의 문명화 과정인데, 그것은 앞서 지적했듯 우리 삶의 안팎을 관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안이 바뀌기보다는 겉을 바꾸는 것이 더 쉽다. 근대 초기에 옷이나 머리 모양 등 겉만 양풍으로 꾸미고 다니는 사람을 가리켜 ‘얼개화꾼’이라고 불렀다. 개화물을 먹은 듯이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얼치기라는 뜻이다. 과연 1920∼1930년대의 모던 보이, 모던 걸들에게 모던하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겉과 속의 일치는 쉽지 않다. 특히나 문명 전환 과정에서 그 둘이 함께 가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리하여 곧잘 겉과 속의 불일치가 나타난다. 이를 ‘문화적 지체(Cultural Lag)’라고 한다.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우리의 경우 겉과 속의 불일치는 매우 깊고 넓게 나타난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근대란 하나의 스타일, 즉 겉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근대의 제대로 된 속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아무튼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우리가 그 속을 제대로 학습할 기회도 없이 허겁지겁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재미학자 최정무는 한국의 근대화를 가리켜 서구의 근대문화가 선사하는 황홀경(판타즈마고리아)에 매혹된 채 단지 그 외양만을 모방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뼈아픈 지적을 한다. 근대의 내면이 아니라 겉모습만을 따라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를 대표적인 예로 든다. 물론 한국의 근대화를 보는 다른 시각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근대화 과정에서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요즘은 디자인이라는 말이 유행어라고 할 정도로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지만 정작 그 의미를 제대로 따져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현대적인 건물, 자동차, 공업생산품들처럼 현대 한국사회가 근대문명에 속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디자인된 것이다. 그러니까 디자인은 한국의 근대화를 가장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증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 근대화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 디자인의 성격을 추적해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한국 현대 디자인을 기준으로 지난 140년간 한국의 근대화라는 문명화 과정이 어떤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한국사회와 디자인에 대해 던져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아닐까 싶다.

최범 디자인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