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의구] 70대 老馬들의 귀환

입력 2016-01-25 17:29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가족애와 이웃의 정을 훈훈하게 그려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눈에 익숙지 않은 연기자들이 소박한 차림새의 투박한 연기로 심금을 울렸다. 25년도 더 지난 과거가 배경이지만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청소년들까지 TV 앞으로 모으는 괴력을 발휘했다.

당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드라마 속 쌍문동 봉황당 골목이 그저 설정일 뿐 실제 존재하기는 어려웠다는 걸 잘 안다. 한 골목에 동년배 청소년이 5명이나 붙어사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다. 나 홀로 가구 한곳 없는 다섯 가정이 한 식구처럼 살갑게 지낸다는 것도, 아파트가 보편화되고 이웃 사이 단절이 심화된 당시 분위기를 감안하면 대표성을 갖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팔’은 호화 캐릭터가 화려한 배경 속에 저마다 제 옳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막장 드라마를 단숨에 넘어섰다. 어설퍼 보이는 복고풍이 비록 실재하지는 않았지만 향수를 자극하는 희미한 가치의 단편들을 떠올리게 한 때문이다.

‘응팔’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즈음 정치권에도 복고풍이 불었다.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에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창당준비위원장으로 합류하고, 더불어민주당에는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 영입됐다. 두 사람 모두 70대에, 정치경력은 1980년대 전두환정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얼마 뒤에는 71세의 진보 지식인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12일에는 동교동계 좌장인 85세의 권노갑 고문까지 탈당 기자회견을 했다.

일반적으로 중진의원들의 물갈이 바람이 거센 총선 국면에서 이들의 등장은 눈길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특히 야당의 선거 브레인으로 재등단한 윤 위원장과 김 위원장은 그간 정치권의 대표적 책사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이미 여러 차례 선거와 정치적 전환기에 국민이 원하는 바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제시하는 능력을 보여 왔다.

‘노마의 지혜(老馬之智)’를 빌리는 것은 전혀 험담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신구 정치가 적극 모색해야 할 아름다운 공존의 모습이기도 하다. 특히 난세에는 젊은 아이디어나 미래를 향한 열정보다 무르익은 경륜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여야,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것도 시비할 일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평행선을 달리는 양 노선 사이 ‘제3의 길’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을 영입한 ‘여의도 복고’가 ‘응팔’과 같은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낼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이들의 면면이 이제 참신과 거리가 멀어져 국민의 향수를 자극할 만한 가치를 제시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수십년이 지나도록 정치가 별로 변한 게 없다는 점이다.

정치가 70대 브레인들을 다시 모셔온 것은 지독한 무능력과 불임성이 원인이다. 60세 정년시대로 접어들고 청년실업이 가중되고 저성장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정치권은 새로운 과제들을 앞장서 해결해 나가는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선거구 획정마저 선거가 80일도 남지 않은 시점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숙제를 제대로 못한 채 이해에만 집착하다 위기를 자초해 놓고는 해결의 길마저 잃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머리만 바꾸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체질이 바뀌지 않으면 이들을 얼굴마담처럼 활용한 다음 선거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시 국민의 외면을 받아 위기 국면이 닥치면 이번에는 다른 세력이 스와핑 하듯 원로들을 영입하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브레인의 영입이 아니라 정치의 머리와 몸통을 모조리 바꾸는 극약의 처방이다.

김의구 편집국 부국장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