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29세 로제타 두고 진료하다 스러진 윌리엄 홀

입력 2016-01-25 18:02
로제타 홀의 남편인 윌리엄 제임스 홀은 1892년부터 평양 개척 선교에 매진했다. 하희정 박사 제공
홀 부부가 거주했던 평양의 가옥 모습. 하희정 박사 제공
로제타의 두 번째 선교지는 평양이었다. 남편인 윌리엄 제임스 홀은 결혼 전인 1892년 봄, 존스 선교사와 함께 평양을 처음 방문한 후 줄곧 개척에 매진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몇 주일씩 평양에 머물곤 했다. 그때까지도 평양은 선교 금지구역으로 외국인들의 장기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94년 5월, 로제타는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남편과 함께 평양으로 갔다. 로제타는 홀로 고군분투하는 남편의 평양개척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1년 전 두 사람이 주선해 부부가 된 박에스더와 박유산도 동행했다. 4년을 일해 온 보구여관은 동대문과 남대문에 개설한 진료소까지 챙길 만큼 안정 궤도에 들어섰고, 닥터 커틀러가 이를 맡기로 했다.



평양으로 향하다

평양은 훗날 로제타의 제자였던 여메레가 진명여학교를 세운 곳이지만 처음에는 녹록한 땅이 아니었다. 로제타가 6개월 된 아들 셔우드 홀을 품에 안고 나타나자, 평양 사람들은 첫날부터 서양부인과 아기를 구경하겠다고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로제타와 셔우드 홀은 평양에 발을 들여놓은 첫 서양여인이요 서양아기였다. 담이 무너질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자 윌리엄 홀은 급기야 아내와 아기의 안전을 위해 10명씩 차례로 구경하도록 줄까지 세워야 했다. 두 모자를 보고 사람들은 마냥 신기해했다. “아기 눈이 꼭 개 눈같이 생겼네. 그래도 우는 소리는 조선 아기들이랑 똑같아.” 평양 사람들은 말이 다소 거친 듯 했지만 한양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로제타는 곧 평양의 여성들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평양 정착은 훗날 한국인 최초 목사로 기록될 김창식과 윌리엄 홀이 개종시킨 오석형이 도왔다.

이틀 째 되던 날 김창식이 관가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난의 시작이었다. 평양관찰사 민병석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변화의 요구를 누르고 기존 권력을 유지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수구세력이었다. 서구 선교사들에게도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 국가들과 맺은 조약 때문에 선교사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자 민병석은 이들을 돕던 조선인들을 대신 잡아들여 죄를 묻고 고문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체포된 김창식은 죽음의 문턱까지 드나들 만큼 심한 고초를 당했다. 윌리엄 홀과 감리교 선교부가 나서서 외교 채널을 가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김창식은 신앙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진리라고 생각하오. 나는 말씀에 따라 살 것이고 계속하여 복음을 전할 것이오.” 김창식이 잘못 될까 노심초사하며 애를 태웠던 윌리엄 홀은 그의 강직한 신앙과 성품에 ‘그의 발아래 꿇어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고백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았던 윌리엄 홀

하지만 로제타와 윌리엄 홀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려한 대로 평양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로제타는 한 달 만에 가족들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 전투가 마무리된 그해 가을, 윌리엄 홀은 혼자 평양으로 다시 돌아갔다. 전쟁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폐허로 변해버린 평양은 여기저기 부패한 시체들로 가득했다. 전쟁이 떠나자 전염병이 찾아왔다. 전쟁 중에도 평양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을 돌보았던 김창식이 윌리엄 홀과 함께 했다. 밤낮없이 환자를 돌보던 윌리엄 홀은 1894년 11월 결국 전염병으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홀은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한양으로 옮겨진 그는 로제타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가 평양에 간 것을 후회하지 마오. 나는 주님을 위해 그곳으로 갔고, 그분께서 보상해주실 것이오.” 로제타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의 품에는 이제 갓 돌을 넘긴 아들 셔우드 홀이, 태중에는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로제타가 윌리엄 홀을 처음 만난 것은 1889년 뉴욕 빈민가 무료진료소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였다. 캐나다가 고향인 그는 “인류를 위해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는 한 퀘이커교 부인의 예언과도 같은 권유에 이끌려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뉴욕은 이민자들로 홍수를 이루었다. 유럽에서 먹고살기 힘든 하층민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이들은 남부에서 자유를 찾아 이주한 흑인들과 더불어 도시의 빈민가를 형성했다. 열악한 주거환경, 끊이지 않는 전염병,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아이들은 늘 아팠고 굶주렸다. 윌리엄 홀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주말에는 좋은 공기를 마시게 하려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강가로 늘 피크닉을 다녔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윌리엄 홀의 신앙과 성품은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제물포에 처음 도착하여 한양으로 들어올 때는 작은 조랑말이 애처로워 걸어왔다. 그는 180㎝가 넘는 장신이었다. 1892년 겨울에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다 길에서 신음하는 부상자를 만나 치료해주고, 주막으로 되돌아가 주인에게 그를 부탁하며 제 돈을 다 털어주고 온 적도 있었다. 성서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그 자체였다. 그 추운 겨울날 길에서 만난 일본인 의사가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면 그는 로제타에게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겐 늘 고난이 따른다. 윌리엄 홀의 죽음은 로제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로제타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그해 겨울 귀향을 선택했다. 하지만 현실에 쉽게 굴복하지는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로제타는 딸 이디스를 낳고 몸을 회복한 후, 윌리엄 홀과 그가 사랑했던 평양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친구들도 적극 도왔다. 1897년 2월 평양에 조선식 기와집으로 세워진 ‘기홀병원’이 바로 그 열매다. 남편은 자신의 묘비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병원이 세워지기를 더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하희정 박사<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