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올리자마자 신혼여행을 왔는데, 항공편이 끊겨 공항에서 노숙하고 있습니다. 숙박업소도 잡지 못하고 공항도 벗어나지 못해 평생에 단 한 번인 신혼여행을 완전히 망쳤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온 유모(30)씨는 24일 ‘전편 결항’ 소식을 접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만 내쉬었다.
제주지역에 32년 만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면서 하늘길과 뱃길이 모두 끊겨 24일에도 관광객 수만명이 고립됐다. 제주국제공항은 지난 23일 오후 5시50분부터 25일 오후 8시까지 항공기 운항을 전면 중단했다. 태풍으로 제주의 항공기 운항이 중단된 적은 있지만 폭설과 한파로 인한 ‘전면 중단’은 초유의 일이다.
국토교통부는 당초 이날 낮 12시쯤 항공기 운항을 재개하려 했으나 폭설과 강풍이 계속되자 25일 오후 8시까지로 추가 연장한다고 밝혔다. 이날 제주에는 순간 초속 15m 내외의 강풍을 타고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이 때문에 관광객 6만여명의 발이 묶이면서 제주공항은 노숙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상당수 관광객은 공항 주변 숙소로 돌아갔지만 숙소도 대부분 꽉 차 2000여명의 관광객은 23일 밤부터 공항에서 노숙생활을 이어갔다. 관광객들은 24일에도 운항이 중단된다는 소식에 발만 동동 굴렀다.
특히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들은 막막한 표정으로 발권 카운터를 바라보거나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거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회사원 이모(46)씨도 “중요한 업무를 앞두고 동창들과 짬을 내 제주에 왔다가 큰 낭패를 보게 됐다”며 “배를 탈까도 생각해 봤는데 해상에는 풍랑경보로 배편도 끊겨 섬에 갇힌 기분”이라고 말했다.
한국공항공사제주지역본부는 비상대책반을 운영해 제주공항을 이용하는 승객들에 대한 종합 안내를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제주도는 직원들을 공항에 보내 식품·물·모포 제공, 숙식 안내 등을 하고 대중교통을 총동원해 관광객들을 공항에서 숙소로 수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항공사들의 무성의한 안내와 노숙에 따른 불편 등으로 승객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승객들은 종이상자와 관광지도를 깔고 대합실과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에서 잠을 청했다. 짐을 나르는 카트는 관광객들이 잠을 청하는 ‘일일 소파’로 변신했다. 종이상자를 나눠주는 과정에서 종이상자 1개를 1만원씩 받고 판매했다는 헛소문이 SNS에 게재되기도 했다.
국제선 출국장에는 제때 떠나지 못한 중국인 관광객 400여명도 발이 묶여 공항 곳곳에서 신문지를 깔고 노숙했다. 관광객 가이드 양모(52)씨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 50여명이 어제도 공항에서 잤고 오늘도 공항에서 잔다”며 “대부분 갈 곳도 없고 숙박비 낼 돈도 거의 떨어져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3층 식당가에는 한꺼번에 손님이 몰리면서 일부 업소에서는 일찌감치 재료가 떨어졌고, 주변 편의점에는 삼각김밥과 라면까지 동이 났다. 공항 내 식당가와 커피숍·패스트푸드점 등에서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곳곳에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화장실마다 세수를 하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와 씻기는 체류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전날인 23일에는 항공사 측의 무성의한 대응에 불만을 품은 중국인 관광객이 카운터로 난입해 의자를 바닥에 던지며 거칠게 항의하다 경찰기동대에 제압당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도 벌어졌다.
제주도는 7년 만에 발효된 한파주의보와 대설·강풍특보로 육상 대중교통 운행도 차질을 빚고 있다. 제주 전역 도로가 얼어붙으면서 1100도로와 516도로, 중산간도로 노선 등 여러 곳의 시외버스 운행이 중단됐고 눈길 고립사고와 교통사고도 잇따랐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항공사들은 제주공항 운항 중단이 25일 오후 8시로 추가 연장됨에 따라 운항이 재개되는 대로 임시편을 최대한 투입할 계획이나 항공대란 장기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제주=주미령 기자 lalij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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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1-24 21:21 수정 2016-01-25 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