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샌더스의 8시간35분 연설

입력 2016-01-24 17:28

무소속이면서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버니 샌더스(74) 상원의원의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비디오가 있다. 샌더스가 2010년 12월 10일 상원에서 진행한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 연설) 영상이다.

샌더스는 당일 오전 9시 의회에 나왔다. 그리고 정확히 10시24분 상원의 연단에 섰다. 상원에서는 누군가 단상에 서면, 본인이 양보하기 전까지는 단상에 계속 머물 수 있다.

이날 연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참 좋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문에 하게 됐다. 샌더스는 상원의 유일한 사회주의자다. 시카고대 재학 시절부터 인종차별 폐지, 반전,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해 투신해 왔다. 1981년 버몬트주의 벌링턴시 시장에 당선된 이후 또 1991년 이후 연방의원을 해오면서도 불평등 차별 해소를 의정활동의 핵심 목표로 삼아왔다.

브루클린에서 셋방살이하던 페인트 판매상 아들로 태어난 샌더스는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을 경우 한 개인의 평생 삶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터득한 사람이다. 그가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한 것도 약자를 위한 건강보험 개혁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 부유층 소비 확대를 통해 경제를 회복하겠다며 공화당과 손잡고 연간소득 25만 달러(2억9000만원) 이상의 부유층에게 혜택 대부분이 돌아가는 9000억 달러(1079조원) 규모의 부자 감세안을 추진해 논란이 됐다.

샌더스는 연설에서 정부의 재정 지원이 시급한 서민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소개했다. 이어 “이 시대에 의회가 빈자와 부자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정치를 하는 게 맞는지 따져보자”고 말했다. 지금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샌더스가 당시 문제 제기한 “상위 1%가 하위 50%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인가”라는 지적은 울림이 컸다.

샌더스는 그런 내용의 연설로 오후 6시59분까지 단상에 머물렀다. 그 8시간35분간 내내 연단을 지키며 ‘부자감세안’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중간에 민주당 의원 2명이 45분, 30분씩 각자 의석에서 의사진행 발언을 펼칠 때도 샌더스는 단상을 지켰다. 69세인 샌더스에게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라는 배려였지만 그는 화장실은커녕, 단 1초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의 열정적이되, 품위를 잃지 않는 연설 태도였다. 연설 종료 때까지도 한치 흐트러짐 없는 모습,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어조, 부당성을 지적하되 악악거리지 않는 태도, 거대 양당에 ‘읍소’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요구’하는 태도에서 미국의 많은 서민들이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연설이 끝났을 때 미 의회 서버는 마비됐다. 연설 동영상을 보려는 사람이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선 ‘샌더스를 대통령으로’라는 글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튿날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마침내 진보의 영웅이 탄생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서민들의 영웅’이 나왔지만 부자 감세안은 아무 일 없었던 듯 압도적 표차로 통과됐고 샌더스는 오랫동안 비통해했다. 그런 비통함은 5년 뒤 샌더스를 대선에 출마하게 하는 에너지가 됐다.

샌더스의 부상은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원칙 없는 이합집산이 아니어도, 당의 부속품이나 청와대의 거수기로 전락하지 않아도, ‘진보쟁이’들의 볼썽사나운 방식의 반대가 아니어도 정치인 개인이 단단하면 ‘힘 있는 정치’가 가능하고, 유권자들은 거기에 감동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이다.

손병호 국제부 차장 bhson@kmib.co.kr